PAPER 이래도 되는 거냐! - 창간 15주년을 맞이한 대한민국 유일의 문화지 또는 향정신성 월간지의 생존 스토리
페이퍼 편집부 지음 / 북하우스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1995년 페이퍼가 무려 창세되었던 그해, 나는 무얼 하고 있었더라.

초등학교와는 완전 딴판인 중학교라는 신세계를 탐험하던 좀만한 꼬꼬마였구나.

그땐 왜 내 긴머리를 싹둑 자르고 팔자에도 없는 (없어야 했다!) 단발머리를 하고 학교를 다녀야 했는지가 내 인생 최대의 미스테리였다. 뭐 결국 풀지못한 숙제로 남았지. 때론 시험지에도 답없는 문제가 나오는 게 인생 아닌가.

 

어쨌거나 그때, 대학가에는 세상에 없던 잡지 페이퍼가 쇠사슬도 없이 풀려나와 '좀 당분간 아무생각 없이 살고 싶다'고 되뇌이는 청춘들의 면전으로 뽀얀 얼굴을 들이댔던 것이다.

밀레니엄을 당한 청춘들의 영과 혼을 위무하며 순식간에 정신적 지주로 부상한 전설같은 잡지의 창간 15주년을 기념하는 책 [PAPER 이래도 되는거냐!]를 읽고나서야 비로소 나는 페이퍼의 창간호가 하얗고 알록달록하고 순진했단 것을 알았다.

 

사실 페이퍼와의 인연은 잡지가 직접 정면으로 맞닦드리면서 시작되었다기 보다 두령님의 [에세이 좋은 건 사라지지 않아요]를 읽으면서부터 였으니 나하고 좀 안 친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20대를 혹은 30대를 몽땅 페이퍼에게 저당잡혀 [페이퍼, 이래도 되는거냐!]를 외치는 페이퍼 식구들이 이토록 많은데 친한 척 한다는 것도 참 후안무치한 일이다. 그치만 수저 하나 더 얹고 싶은 마음에 이따위 리뷰를 쓰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데이트조차 없는 명절(비루하다는 표현은 쓰고 싶지 않다. 주말 내내 사무실에서 일하며 맞은 새해는 얼마나 값지냐. 하지만 일지를 적으며 푹푹 한숨을 쉬었다. 어쨌건 데이트조차 없어 명절 연휴를 고스란히 일하는데 쏟아부은 것이 유쾌한 일은 아니잖아.)의 동반자로 나는 채송화색 표지와 도발적인 켈리를 장착한 [페이퍼, 이래도 되는거냐!]를 준비해두었다. 그리고 잘 읽었다. 가끔 졸아가며 자주 웃어가며. 이제 새벽이다.

 

 

내 경험에 의하면 '무엇'에 관해 할 이야기가 많은 것이 좋은 기획이다. 보기에는 그럴 듯해도 막상 이야기를 진전시켜보면 다들 입을 꾹 다물게 되는 기획도 있다. 그럴 때는 미련 없이 버린다.

어떤 테마를 고르냐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요리하는 방법이다. 요리과정에서 줗은 재료가 맛을 잃기도 하고 평범한 재료가 특별한 맛을 얻기도 한다.

페이지 71-73 네번째 이야기 엉망진창 횡설수설이어도 되는거냐! 중에서

 

중요한 것은 책임감이다.

 

시도는 명랑상쾌하더라도 그것이 용두사미가 된다면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 신선함이 더할수록, 그 신선함을 신선하게 유지하지 못한다면 별볼일 없게 되기 십상이다.

페이퍼의 가치는 신선함이 계속 신선할 수 있도록 이 잡지를 펴내 온 진지한 책임감이라고 감히 이야기해 본다.

 

잡지 내용이 신선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잡지니까 일단 인쇄가 되어 나와야 하고 하는 그런 오만잡다한 것을 다 싸잡아서 어쩄거나 이 잡지가 어느날 하염없는 안녕을 고하는 대신 계속 얼굴을 디밀고 나오고 있다. 2013년 2월호가 인터넷서점에서도 판매중이다. 이게 책임감이다.

 

한 번의 발칙함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그 발칙함을 날마다의 영역으로 끌어오면서도 일상에 함몰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고수의 경지. 페이퍼는 발칙하고 재미나게, 신선하고 진지하게 매월 발행 중이다.

뭐 결론은 재밌다는 거다. 페이퍼 창가 15주년을 기념하며 나온 페이퍼의 자서전인 이 책은 참 재미있다. 페이퍼의 적당한 기사들을 수록해주어서가 아니라 이 한 권의 잡지를 15년이나 발행해 온 사람들의 술냄새나는 뒷이야기들이 적나라하게 들어있어서 재미있다. 얼마나 신나게 그리고 얼마나 치열하고 꼼꼼하고 야무지게 매달려야만 했는지 알려주어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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