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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경계
조정현 지음 / 도모북스 / 2012년 11월
평점 :
'울타리'를 아직도 안전의 경계라고 인식하는가?
아니다. 지금 당장 아무 포털 사이트의 검색창에 울타리라고 쓰고 검색해보라. 곧장 '울타리 내 건물의 소유주' 따위의 검색 결과들이 화면을 채울 것이다. 울타리는 안전의 경계가 아니라, 소유의 경계다. 울타리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 혹은 울타리 내에 있다는 것은 울타리의 소유(가 된다)라는 뜻이다. 고려와 조선시대, 원과 명에게 보냈던 공녀들은 울타리의 소유였다. 울타리의 소유들은 울타리를 지키기 위한 제물이 되어 울타리 밖으로 반출되었다. 소설 화려한 경계는 그렇게 반출된 울타리의 여인들에 대한 기록이다.
이 책의 저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공녀에 대해 남아있는 사료는 너무나 적다. 그 때문인지, 혹은 나라를 위해 몸을 판 여인들이기 때문인지 '공녀'에 대한 연구도 적다. 원으로 보내는 공녀들의 명단을 종이류로 적어 넣고 물건처럼 보냈던 울타리의 행태에 격분할 기회는 매우 적다. 이미 너무나 멀고 먼 이야기가 되어버렸으니 경계 안에서 '안전'을 만끽하는 우리는 차마 알려고 해보았자 알 길이 만만치 않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소설을 읽는 모양이다. 어렵고 딱딱한 사료를 뒤져 그들의 아주 적은 그림자를 좇기보다, 생생하게 묘사된 백여년 전의 삶으로 잠시 빠져들어가는 것이 우리에게는 더 쉬우니. 그래서 작가들은 역사소설 쓰기를 멈출수 없는 것이다. 이 땅에는 잊기엔 너무한 사건과 사람들이 바닷가 모래알보다 많다. 작가는 어찌어찌 그들을 되살려 종이 위에 부활시키기 위해 오래 묵어 스러져가는 기록들을 뒤지며 먼지로 호흡하는 것을 기꺼이 여겼을 것이다.
“고려와는 다른 나라를 만든다면서 어찌 다시 공녀를 보낸단 말인가?”
“딸자식은 낳지를 말아야지, 어여쁜 얼굴이 화가 되어 고향을 떠나니, 나라가 약해 딸들을 팔아먹는구나.”
통곡 속에 비분강개한 선비들의 목소리도 간혹 들렸다. 나는 애써 서러운 마음을 달래며 눈을 크게 뜨고 고국산천의 모습을 기억에 담았다.
페이지 98
“후비가 한둘이 아니었을 텐데, 어찌하여 우리 언니만이 순종을 당했단 말이냐?”
작은 아가씨의 물음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아무리 황성과 한성이 사천 리 길이라도 그렇지, 생떼같은 젊은 목숨 삼사 천이 어미 아비를 부르며 죽어 갔는데 어찌 그 어미 아비의 나라는 이리도 까맣게 모를 수가 있단 말인가? 전쟁에 죽으면 차라리 이유나 알고 죽지만, 억울한 누명에 이리저리 몰려 그물에 걸린 고기들처럼 한 손에 떼로 죽으니 그 죽음이 어디 온전할 수가 있겠는가. 나는 하룻밤에 죽어간 조선 여인들의 사연을 천천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자주 중단되었다. 한숨을 길게 쉬지 않고는 그 많은 죽음을 입에 올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다.
페이지 244
생각해보면 참으로 애통터지는 일이다. 품에 안고서도 보호해 주지 않던 울타리는 당연히 내친 후에도 본체만체다. 오히려 내쳐진 소유들이 그들의 목숨으로 울타리를 둘러싸고 지켜야 했다. 울타리가 나와는 일억만리 남남이라면 오히려 참담한 심정은 덜할 것을. 울타리는 내 부모요 형제요 친족이다. 부귀영화는 반겨 받을지언정 생떼같은 젊은 목숨이 타향에서 덧없이 스러진 데에는 귀동냥도 하지 않는다. 이 울타리라는 경계는 대체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걸까?
냉정하게 따지면, 소설적 재미는 크지 않다. 공녀라는 이름으로 너무 많은 인물들을 이어보려고 했다. 시도는 좋았지만 어떤 이야기들은 외딴 섬처럼 마냥 다른 바다에 떠 있기만 한다. 일부러 냉정하게 쓰려고 했던 것인지 아니면 감성에 호소하는데 실패한 것인지 기구한 사연들을 몇겹으로 포개어 담았지만 슬픔이 해일처럼 밀려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고려말과 조선초, 한반도와 중원의 관계 그리고 그 당시의 시대상과 역사의 제물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여인들의 상황에 대한 전달만큼은 생생하다. 지금은 돌이킬 수 없는, 역사 교과서 만으로는 충분히 느낄 수 없는 지나간 시대를 알기 위해 역사소설을 읽는다면, 적어도 읽는 목적에는 부합하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