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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비친 우리의 초상
조한욱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10월
평점 :
한국교원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조한욱 교수의 칼럼이 책으로 묶여 나왔다. 작년 11월부터 한겨레 신문에 '조한욱과 서양사람'이라는 칼럼을 연재해온 저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서양 역사의 에피소드들을 우리 사회의 거울로 삼아 왔다. 당연히 정치적일 수밖에 없고 다분히 드러나는 그 선명한 주장이 어쩌면 이 칼럼의 존재 이유일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저자의 정치사회적 목소리에 공감하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그가 들려줄 낯선 역사 이야기 때문이었다.
페트라르카가 몽방투에 올라 자연의 장엄한 풍경 앞에 남긴 성찰의 메시지, 완전한 지성인이었기에 비난에 매몰된 크리스티나 벨조이오소, 1988년 독일 크산텐에서 펼쳐진 황홀한 평화의 콘서트. 그의 칼럼마다 무대로 삼은 에피소드들은 대단히 흥미로웠다. 모든 일이 그렇듯 당당히 드러나 있는 표피보다 그 속내가 더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법. 이미 지나간 시간 속을 조금 더 들춰보고 쪼개며 서양 역사의 깊은 물 밑에 가라앉아 있던 새로운 사람, 새로운 에피소드들을 만나는 일은 역시 재미있다.
그러나 재미는 어디까지나 저자가 집어 낸 서양 역사가 우리 사회 부조리함의 판박이임을 이야기하기 전까지만이다. 국민들로 하여금 정부와 치정자들에게 진절머리를 칠 수밖에 없게 하는 정치사회의 각종 사건사고들이 서양 역사 속 깊숙히 숨어있던 이성의 야만의 재현임을 조목조목 짚어내는 저자의 칼럼을 읽다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한숨이 튀어나오는 우리의 현실을 노골적으로 바라보게 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문장 사이사이 들어박혀 있는 조소가 매번 뒷맛을 텁텁하게 한다.
그래서 책을 끝까지 다 읽는 게 너무나도 힘이 들었다. 애초에, 내가 왜 단순히 역사(와 그 해석)에 대한 궁금증만으로 이 책을 읽으려고 했을까, 후회할 만큼 어려웠다. 저자가 꼬집은 '이성의 야만'은 분명 여기에 있다. 국회에 있고, 청와대에 있고, 거리에 있고, 신문에 있다. 그러나 그 이성의 야만이 특별히 누구들에게만, 어느 한 쪽에게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어느 한 쪽에만 책임이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시비를 가려야 할 때, 잘잘못을 따지고 생산적인 향방을 모색해야 할때 '야만'은 더 없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잘못은 꼬집어야 하나 그것이 조소가 된다면 그것 역시 이성의 야만 아닌가. 부조리를 지적하고 개선을 부르짖는 목소리에 덕이 없을 때에도 역시 야만은 여지없이 고개를 들기 마련이다.
공자는 정치를 正治라고 했고 장자는 덕이 아니면서 오래 가는 것은 세상에 없다고 했다. 비단 정치가들 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정치에 쓴소리를 하는 사람들, 그 쓴소리에 동조하거나 혹은 반박하는 대중들까지도 正과 德을 생각해야 하는 게 바로 지금이 아닐까 싶다. 어찌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땅을 딛고 살면서 너만 잘못이 있고 나만 옳을 수 있나. 품위있게 잘못을 짚어내면서도 상생의 길을 함께 찾아가는 길은 정말 없는 걸까. 내 눈에도 들보가 있으니 너도 티끌 빼고 나도 들보 빼자, 이런 형태의 공존은 불가능한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