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덟, 죽거나 혹은 떠나거나 - 콘크리트 정글에서 진짜 정글로
제니퍼 바게트.할리 C. 코빗.아만다 프레스너 지음, 이미선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올 여름을 지나면서 부끄러운 취미가 하나 생겼다.

비가 유난히 많이 내린데다 예년과 다르게 한 주 걸러 한 주씩 골골대며 보냈던 올 여름에, 나는 결국 꿈만 꾸던 지리산 종주를 다녀오지 못했다. 쓰리고 아쉬운 나의 마음과 빌빌 거리는 몸을 달래준 것은 여행 에세이. 여행 자료들을 꼼꼼하게 담아준 여행 서적은 오히려 시큰둥했고 여행지에서의 느낌을 작가의 개성으로 잘 감싸 부친 소포같은 그런 여행 에세이들이 무척이나 좋아졌다. 특별한 사진이나 자료들이 없어도 글만으로 충분하다. 때로 눈이 아닌 머릿속에서 그리는 게 더 황홀할 때가 있으니까.





여름이 다 지난 지금, 내 부끄러운 여름 취미가 섭렵한 여행 에세이 목록에 뒤늦게 이 책이 발도장을 찍었다. [스물여덟 죽거나 혹은 떠나거나]. 일상에 파묻혀 앨리스같은 담대한 내가 죽어버리거나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빨간 알약을 삼키듯 짐가방을 들고 떠나거나. 굳이 스물여덟이 아니라도 인생은 언제나 그 사이인 것 같다. 죽거나 혹은 떠나거나.




도심 한복판에서 복달거리며 뉴욕 문화의 첨단을 향유했을 세 여자가 합심해 세계 여행을 떠났으니 당연히 그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건드리는 어떤 깨달음이 있을터였다. 그토록 긴 여행을 그토록 고생해서 다녀왔는데 가슴과 정신에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면 그게 더 빅 이슈. 그래서 이 여자들이 여행지에서 무엇을 느꼈는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내 구미를 당긴 것은 동기였다. 스물여덟이라는 중요한 나이에 왠 세계여행? 혼자도 아니고 셋이서.








다른 사람들의 물건들을 집채만큼 큰 보따리로 싸서 나르는 짐꾼들은 자신들이 갖지 못한 것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그들은 작은 물건에도 하다못해 남이 쓰다 만 항생제 연고에도 감사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주름지고 살짝 바랜 것 같은 그들의 눈이 내게는 아르마니 정장을 입고 월스트리트를 걸어가고 있는 어떤 남자보다도

더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다.

- 할리, P110







로프가 끊어지면 어쩌지? 양 볼이 심하게 퍼덕이네. 주의를 기울여. 그렇지 않으면 경치를 못 보고 지나치게 돼.


그러나 나의 마음속에 불현듯 떠오른 한 가지 생각은 이것이야말로 하늘을 나는 것과 가장 비슷한 경험이라는 것이었다.

- 젠, P544














서른을 앞두고 있는 스물 여덟(혹은 스물 아홉이나 서른에 이르기까지, 이십대 후반을 보내는 여인들에게 스물 여덟이나 스물 아홉이나 뭐 그리 큰 차이가 있겠나)은 분명 불편한 나이다. 주변에는 벌써 애가 둘인 대학 동창도 있고 오래된 남자친구와의 결혼은 대체 언제 할거냐고 어른들은 성화이신데다 직장에서는 위에서 찍고 아래에서 치고 올라와 그야말로 샌드위치 신세. 분명 아직 빵!하고 터질 열정은 남아 있는데 아무데나 터뜨릴 수는 없고 적당한 배출구가 없어 더 혼란스럽고 불편한 이십대 후반은 그러나, 정말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가 버리고 만다. 고민만 하다가 어느새 훌쩍 서른이 되고 서른 중반이 되는 게 현실이다. 결국 그런 현실 앞에 뉴욕의 세 아가씨들은 굳은 결심을 했다. 오랜 연인과의 위기도, 경제적인 어려움도 이들의 여행을 막을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들의 여행은 그들의 일상이 가져온 그런 갈등이 있었기에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갈등이 없었다면 누가 생각이나 했겠나. 이렇게 늙어가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그렇게 시작된 용감한 아가씨들의 기나긴 여정이 이 [스물여덟 죽거나 혹은 떠나거나]에 담겼다. 그녀들이 여행 가방을 꾸릴 수 밖에 없었던 각자의 개성 넘치는 사연들과 극적인 의기 투합, 그리고 드디어 시작된 여행. 혹시 별4개 이상의 편안한 호텔에서 머물며 고급스럽고 풍요로운 먹거리를 즐기고 낮에는 명품 쇼핑이나 박물관 관람으로 밤에는 분위기 있는 와인바나 화려한 파티장을 도는 그런 여행을 꿈꾸는 여자라면 이 책의 주인공인 그녀들과 코드가 맞지 않을수도 있다. 제니퍼, 할리, 아만다는 남미의 오지와 정글을 누비고 인도와 동남아를 겁없이 돌아다녔으니 말이다. (종종 값싸고 푸짐한 현지 식사를 즐기기도 했지만) 며칠씩 이어지는 고된 하이킹을 하며 초코바 하나로 배고픔을 달래거나 바퀴벌레가 드글드글한 침대에서 잠을 청하거나 온갖 소음이 난무하는 여행자 숙소에 지친 몸을 눕히는 그녀들의 여행은 유명한 어르신들의 격언을 떠올리게 한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







그러나 여행을 하면 할수록, 전 세계 여성들의 실상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수록,


그들이 얼마나 무력한지 알게 되었고 반면에 내가 그동안 엄청난 혜택을 받으며 살아왔고 터무니없이 순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아만다, P377












여리고 발랄한 제니퍼,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아만다, 진중하고 부드러운 할리. 마치 삼각형의 세 꼭지점처럼 이들은 서로 균형을 맞추고 존중하며 경쾌한 여행을 만들어간다. 분명 저 세 명 중에 누구 한 사람이라도 노력이 부족했다면 일 년에 걸친 그들의 긴 노정은 분명 중간에 틀어졌을 것이다. 세 주인공의 시점을 번갈아 돌아가며 진행된 [스물여덟, 죽거나 혹은 떠나거나]는 드라마틱한 여행의 순간들 뿐만 아니라 더 강하고 아름다운 정신으로 남은 생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여자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여행 에세이보다 더욱 재미있다. 내가 그들과 같은 또래라서, 나 역시 그들이 가진 고민과 같은 생각으로 앓고 있기에 그들의 여행기(인 동시에 성장기이자 성찰기)가 재미있을 수밖에 없었다. 세 주인공 모두 나름의 매력이 가득한 멋진 친구들이었지만 나는 누구보다 할리에게 매력을 느꼈다. 긍정적이고 온화하면서도 신중한 성격의 할리는 내가 누군가에게 이런 사람이기를, 동시에 나에게도 이런 친구가 있기를 바라게 만들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을 따라가면서 우리는 딱 두 가지 실수를 한다. 하나는 끝까지 가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작도 하지 않는 것이다.'

할리가 인도에서 요가 수행을 하던 중에 인용한 이 말은 할리의 가슴 속에 있다가 문득 수면 위로 떠오른 것처럼 언젠가 내 인생에서도 다시 떠올라 나의 용기를 북돋워 줄 말이 될 것 같다. 길을 잃더라도 여행은 떠나는 게 옳다. 어차피 인생 자체도 여행이고 우리는 다 나그네인데 길을 잃어봐야 헤매이는 것밖에 더하겠나. 멈추지만 않는다면 헤매다 길을 찾거나, 새로 길을 내거나 결국 길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 책을 읽은 누군가는 '지금 가방을 싸고 있다.'고 서평을 남기기도 했다는데, 나 역시 배낭을 짊어지고 청계산 야간 산행이라도 해야할 것만 같다. 가슴이 두근두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