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1 - 미천왕, 도망자 을불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포도나무를 괴롭힐수록 좋은 와인을 만난다.' 와인생산자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다. 좋은 와인을 빚을 좋은 포도를 맺으려면 포도나무는 자갈이 많고 척박한 토양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거기에 햇빛은 강렬하고 심지어 강우량까지 적은 기후에서 포도나무는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곤핍하고 고단한 시간을 보낸 포도나무에서 열린 포도는 오랜 숙성을 거쳐 명주가 된다.

옛 사람들을 만나고 우리의 역사를 마주할수록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의 땅은 어쩌면 커다란 과수원. 거친 광야에 먼저 자리 잡은 선진들이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뻗었다. 향기로운 과실을 맺기 위해 그 척박함을 견디고 이겨 점차로 더 아름답게 이 땅이 가꾸어져 우리에게로 흘러온 것 아닐까. 우리가 오늘의 달콤한 결실을 만나기 위해 백 년 혹은 천 년 전에 이 땅에 머물렀던 사람들은 고단함을 견뎌야 했을터다.


을불이 낙랑과의 전투에서 대승하고 결국 고구려의 긍지를 회복한 그 순간, 그는 동천왕부터 봉상왕 시절까지 진나라에게 무릎을 꿇은 채로 견뎌야 했던 세월들을 떠올렸다. 고구려가 진나라의 군사를 몰아내고 낙랑을 회복하는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개인 을불과 나라 고구려 모두가 참담하고 고단한 시간들을 지나왔다. 그래서 승리가 있었고 감동이 있었다.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것은 소설 [고구려]가 을불이라는 덕장을 통해 그리는 감동이 낙랑 전투의 대승, 그 한 순간에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고구려]의 진짜 감동은 을불과 고구려가 향기로운 승리를 결실하기까지 통과해야 하는 고생길 굽이굽이에 깊이 흐르고 있다.


"왕이 밥을 지었다고!"

"그렇다."

"밥이라! 나는 낙랑군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

문호는 껄껄 웃으며 자신의 창을 잡아들었다.

"애초에 이길 수가 없는 싸움이었구나. 천시, 지리, 인화라 했거늘 우리는 무엇으로 저들을 대적했는가! 군사를 부림에 한참 미치지 못했음을 이제야 알겠다." (3권 중에서)


왕손인 을불이 집도 절도 없이, 비천한 소금장수의 초라한 행색으로 낙랑까지 흘러들어갔다. 유복하고 풍성했던 시절 자신의 삶 밖에 보지 못해 화를 불렀던 그는 고독하게 유리하는 동안 타인의 삶으로 시야를 확장했다. 천민으로 취급받고 노리개와 웃음거리가 되는 고구려인, 죽은 아이들을 삶아먹을 수밖에 없는 처참한 숙신 사람들, 대의를 위해 기꺼이 희생과 충의를 보여주는 많은 사람들. 단 하루 몸도 마음도 편히 누워 쉴 수 없는 모진 날들이었겠지만 그 속에서 포도나무처럼 을불은 자랐다. 혹독한 삶의 고개들을 넘는 그에게 지혜와 덕이 차곡차곡 쌓였다. 궁 안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알뜰살뜰한 가르침을 받은 을불 역시 덕망 있는 군주로 성장했겠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봉상왕에게 잃고 궁 밖으로 도망한 후에 을불은 비로소 고구려의 대업을 이룰 왕재가 되었다. 어쩌면 그에게는 가혹한 말이겠지만 을불이 도망자가 되었기에 을불과 고구려 모두가 살았다.


소설 [고구려]는 제1권 첫 장에서 스승과 제자인 두 선인의 대화를 시작으로 제3권에서 승리의 감격 속에 여정을 마치기까지 이러한 을불과 고구려의 역경을 담고 있다. 짧고 군더더기 없는 김진명의 필치는 거침없이 숙숙 달려 고구려를 회생시킨 위대한 왕인 미천왕의 생애를 박진감 있게 그려냈다.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북방 정벌의 긍지로 기억되는 고구려의 패기와 덕망이 김진명이 그려내는 미천왕기 속에서 고스란히 살아난다.


그렇게 김진명을 통해 부활한 고구려의 시간은 우리에게 알려준다. 영웅과 강한 나라 모두 운명처럼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하늘의 운세대로 나라가 무너지는 별자리를 거슬러 을불과 고구려는 치열하게 싸워 살아남았다. 그리고 우리는 역사의 기록을 펼치고 더듬어본다. 이렇게 강한 고구려가 우리의 역사 속에 있었노라고. 그러나 고구려와 그 왕들은 이제 그 장렬했던 순간을 두근거림과 아득한 긍지의 역사로 남긴 채 이 땅에 묻혔고 지금 우리가 서 있다. 우리는 제대로 살아남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척박한 토지를 견디어 낸 포도나무의 자취를 기억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 이후에는 무엇이 남을까.


[고구려]라는 소설이 비추는 것은 우리 역사에의 재조명이 전부가 아니다. 불세출의 영웅 을불과 고구려의 역사에 관심을 갖고 우리의 역사를 아는 것에서 한 걸음이 더 필요하다. '우리 젊은이들이 삼국지를 읽기 전에 고구려를 먼저 알기 바란다.'는 저자의 말은 단순한 관심과 앎이 아니라 우리나라와 민족에 대한 긍지, 그리고 이 긍지의 계승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노력을 촉구하는 바람 아닌가. 17년이라는 인고의 세월 끝에 김진명이라는 작가는 소설 [고구려]를 맺는 것으로 소임을 다했다. 남은 것은 이 가슴 떨리는 소설을 읽은 우리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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