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키
존 윈덤 지음, 정소연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출판과 함께 빛을 발하는 것은 어쩌면 오히려 쉬운 일이다.

다음 십년 그리고 그 다음 십년,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강력한 흡인력을 발산하며 독자를 끌어당기는 것보다야 쉬운 일이 아닌가.

그래서 베스트셀러와 스테디셀러의 단계를 넘어 그보다 오래오래, 세대와 인종, 문화마저 다른 독자들에게까지 그 가공할 매력을 발휘하는 작품들은 명작이라고 불린다.







1900년대 중반, SF 소설과 영화계에서 막강한 상상력을 발휘했던 존 윈덤의 1968년 작품 <초키>는 명작이다.

작품은 반백년 정도 전에 출간되었고 그 상품성을 인정받아 TV시리즈로 제작되기도 했다지만 그마저도 벌써 16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2011년의 가을인 오늘, <초키>에서는 세월의 묵은 내를 거의 느낄 수 없다. 43년 전에 쓰여진 이 공상 소설은 여전히 흥미진진하고 강력하다. 마치 히치콕의 스릴러가 그러한 것처럼.








어떤 아이들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내 친구'가 있다.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이자 어느 때라도 내가 필요할 때 나와 대화할 수 있는 그런 착하고 좋은 친구. 처음에 데이비드는 아들 매튜에게도 그런 친구가 생긴 줄 알았다. 데이비드의 아내는 매튜의 새 친구, 초키가 시간이 지나면 매튜의 의식 속에서 사라져버릴 어떤 공상의 존재라고 성급히 단정짓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데이비드는 매튜와 대화를 나누는 초키가 매튜가 만들어낸 공상의 존재가 아님을 믿을 수 밖에 없게 된다. 수영을 전혀 하지 못하던 매튜가 갑자기 수영선수같은 수영실력으로 수영협회의 훈장을 받는다든가, 그림에는 영 소질이 없었는데 어느날 참신하고 기이한 시선과 기술로 주목할 만한 작품을 그려낸다든가 하는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고 매튜는 이런 이상한 일들이 자신의 능력이 아닌 초키가 해낸 일이라고 털어놓는다.





문제는 '초키'다. 이 초키라는 존재는 매튜를 대신해 수영을 하거나 그림만 그리는 게 아니었다. 초키는 1년이 왜 365일이어야 하는지 왜 하루는 24시간이어야 하는지에 강한 의문과 반발을 갖는다. 신형 자동차나 배의 엔진이 매우 낭비가 심한 구식이라며 힐난하고 성별이 남과 여, 둘로 나뉘어 있는 것 역시 비효율적이며 혼란을 야기한다고 주장한다. 지구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에 의문을 가지고 인간이 가진 공학기술과 세계관에 딴지를 거는 것이다.













<초키>는'초키'가 일으키는 사건들과 '초키'를 인지한 사람들이 벌이는 사건, 이 두가지가 맞물려 돌아간다. 초키는 유일하게 교통이 가능한 상대인 매튜를 통해 어떻게는 목적을 달성하려고 애를 쓰고 매튜는 초키에게 시달리면서도 초키와 자신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해 애를 쓴다. 매튜의 아버지 데이비드는 초키 때문에 힘들어하는 아들을 돕고 점점 통제가 어려워지는 상황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고 매튜의 무의식 최면을 통해 초키를 발견한 과학자들은 급기야 매튜를 납치하기에 이른다.

얼핏 우주에서 날아온 지성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SF 공상 소설같지만 만약 그게 전부였다면 <초키>는 SF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 같은 독자에게 절대 매력적일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당신이' 초키가 실재하는 양 말하기 시작하는군."

메리가 손을 뻗어 담배를 집어 들고 불을 붙였다.

"실재한다는 개념은 상대적이야. 악마, 악령, 마녀 등도 그걸 믿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진짜 존재하는 것들이지.

마치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신이 실재하듯이 말이야. 자기 믿음에 따라 살기 시작하면 객관적인 실재는 거의 무의미해져.

그래서 우리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걱정하는 거야. 매튜의 놀이에 어울려주면서 우린 매튜의 믿음을 강화시키고,

이 초키라는 존재를 더 확고하게 만들어 버릴지도 몰라."

p51~52 페이지









"초키도 제가 그림을 못 그렸다고 했죠. 전 열심히 했지만 잘 그려지지가 않는다고 대답했고요.

그랬더니 초키가 그건 제가 주위를 제대로 보지 않아서래요. 전 '제대로' 보는 게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고 했죠.

보거나 보지 않거나 둘 중 하나라고요. 그러니까 초키가 아니라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보지 않으면서도 보고 있을 수 있다고, 제대로 보지 않으면 그렇게 되기도 한 대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조금 말다툼을 했죠."

p118~119








매튜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이건 옳지 않아요. 초키가 받아야 할 상이에요. '초키가' 저와 폴리를 구했어요.... 이건 사실이 아니에요, 아빠..."

아이는 고개를 수그린 채 메달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성장이라는 과정이 주는 충격, 환상이 깨어질 때의 고독한 상처가 남기는

가슴에 사무치는 기억들을 떠올렸다. 정당하지 않은 상을 주기도 하는 세상에 자신이 살고 있다는 자각도 그중 하나였다.

가치가 흔들리고, 믿음직스럽던 것들이 갑자기 보잘것 없게 느껴지고, 확고하던 것이 공허해지고,

금이 놋쇠가 되고, 어디를 보아도 일관성이라고는 없는.......

p203~204









우주 저편에서 등장한 고등 지성체인 초키를 내세운 이 이야기 속에는 '인격'과 '자아'를 가지고있는 생명체들이 고민하는 실존에 대한 철학이 숨겨져 있다. 이야기 초반, 12살 평범한 소년인 매튜를 평범하지 않게 하는 초키의 정체-외계에 대해 궁금해지다가 초키(작가)가 계속 던지는 의문과 초키를 둘러싼 사람들의 반응이 진행될수록 관심은 더 이상 외계가 아니라 지구로 수렴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별을 움직이는 법칙, 관념과 질서에 대한 재기넘치는 비판이 초키와 매튜, 데이비드의 말 속에 담겨 있다. 존 윈덤의 날카로운 통찰은 시대가 지나도 녹슬지 않고 여전히 묵직하다.




그래서 재미있다. 초키의 정체에 다가가는 과정도, 초키로 인해 사건에 휘말리는 매튜의 심리를 따라가는 것도, 매튜를 지키기 위한 데이비드와 메리의 상반된 노력과 반응을 지켜보는 것도. 너무 진지하지도, 어렵거나 복잡하지도 않은 이야기가 군더더기 없이 흐르면서 사건 속으로 자연스럽게 빠져든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직접 감독 및 제작을 맡아 영화화하고 있는 데에는 아마도 시대를 초월해 독자를 매료시키는 존 윈덤의 깊은 성찰과 지성 때문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든다. 과연 스필버그가 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어떻게 빚어낼까, 벌써 기대가 된다.






* 존 윈덤은?

1903년에 태어나 1969년 타계했다. A.C.클라크, E.F.러셀 등과 함께 영국 SF계의 대표적 작가이다. 《트리피드의 날》(1950) 《해룡() 잠을 깨다》(1953) 《저주받은 마을》(1958) 등 우주의 침략을 테마로 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단순한 SF 스릴러가 아니라, 한계상황에 놓인 지구인류와 인간성과의 대비를 영국풍의 면밀한 수법으로 그려낸 극히 사색적이고 독특한 작품들을 쓴 작가로 평가받고 있으며 트리피드의 날, 저주받은 마을 등이 영화화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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