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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 도서관
조란 지브코비치 지음, 김지원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막 집을 나서려고 문을 여는데 문 앞에 남색 셔츠를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처음보는 너는 누구냐 '싶었는데다 문을 세게 열어젖혔으면 다치기라도 했을터라 나는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종이로 포장된 소포 하나를 들이밀었다.
'택배요.'
소포가 자주 오긴 했지만 그날은 아니었다. 집으로 올 택배가 없었는데. 어디서 보낸 거지?
내가 더듬더듬 소포를 건네받자마자 그는 곧장 몸을 돌려 계단 밖으로 사라졌다. 보낸이 주소가 낯설어 나는 잠시 소포를 든채로 현관에 서 있었다. 여기가 어디더라. 머리에서는 영 기억이 나지 않는데 손으로 만져지는 느낌이 책이다. 책이라니. 누가 보냈건 어차피 나한테 온건데 내 책이다. 이미 손톱은 망설임없이 날을 세우고는 종이 포장지를 푹 찔러 포장지를 벗겨내고 있었다.
[환상도서관]
- 미치도록 가지고 싶은, 죽도록 없애고 싶은 책, 책, 책.....
뭐야, 이 지극히 책벌레스러운 제목은. 표지마저도 별로다. 이런 고루한 색은 90년대 이후로는 아예 쓰질 말아야되는데 왜 출판사들은 그걸 모르는 걸까. 나도 모르게 콧방귀를 흥, 뀌다가 시계를 보고는 황급히 문 밖으로 달려나왔다. 오늘은 토요일이라 도서관이 일찍 문을 닫는다. 아까 그대로 나갔으면 지금쯤 거의 도서관에 가까워졌을텐데 뭐야. 예약해두었던 책을 한달만에 빌릴 수 있게 된 날이라 더 기다리고 있었는데 말이지.
마침 버스가 정류장에 정차하는 순간과 내가 정류장으로 정신없이 뛰어내려간 순간이 맞아떨어졌다. 가까스로 버스를 탄 나는 숨을 고르며 빈자리에 앉았다. 이십분즈음만 가면 도서관이니 다행이 늦지는 않겠다. 마음이 조금 느긋해지니 엉겁결해 그대로 손에 쥐고 나온 [환상도서관]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버스타고 가는 동안 네가 내 이동도서관이다. 여느 때와는 다르게 작가 소개나 역자의 말 등은 읽지 않고 건너 뛰었다. 대체 이 오타쿠스러운 제목 속에 무슨 이야기를 넣어 놓은 건지 그게 더 궁금했다. 목차만 대충 훑고 바로 이야기 첫페이지부터 읽어나갔다.
'이메일은 완벽하지 않다. 인터넷 서비스 업체에서는 아마 우리가 원치 않는 메시지를......'

누군가 부저를 눌렀다. 안내방송이 '**도서관입니다'라고 하는 걸 간신히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사 아저씨의 욕지기 비슷한 불평을 들으면서 허둥지둥 내렸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다시 책 속에 얼굴을 묻었다. 주춤주춤 걷다보니 도서관이었다. 주말인데다 닫을 시간이 가까워져서 그런지 사람이 없나보다. 백지처럼 고요한 도서관 건물로 들어가 아무데나 앉은 나는, 활자가 넘실대는 [환상도서관]의 페이지를 계속 넘겼다. 그리 두꺼운 책이 아니었는데도 페이지는 끝없이 이어졌다. 그래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1/3만, 반까지만, 아니 이 다음 꼭지까지만...... 뭐 어차피 거의 다 읽었는데 그냥 다 읽자.
'철컥'
흠칫하고 고개를 들었다. 건너편의 까만색 대리석 벽이 입을 약간 벌린 내 얼빠진 표정을 따라하는게 보였다. 도서관 내부의 불은 다 꺼지고 실내에 남은 건 푸르스름한 비상구 표시등과 바깥의 가로등이 비추는 어르슴한 빛 뿐이었다. 정적.......... 이상하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 맞다, 내가 예약했던 책. 잠깐만, 도서관이 지금 문을 닫은거지? 나가는 문도 다 잠긴건가? 어떡해, 나 어떻게 나가지? 당황한 나는 귀를 긁적이며 엉거주춤 짐을 챙기고 일어났다. 아, 진짜 이 이상한 책때문에 오늘 저녁 일진이 이상하네. 나는 가방을 들쳐매다 손에 들고 있던 [환상도서관]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바닥으로 몸을 눕힌 [환상도서관]이 작은 몸을 활짝 젖히고 그 넘실대는 활자로 가득한 속지를 내보였다. 휘리릭.... 바람도 없는데 페이지가 넘어간다. 그래 맞아, 아까 거기까지 읽었지.
선채로 [환상도서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잠시 인터미션을 가졌던 머릿속의 무대에 다시 불이 들어왔다. 나는 어깨에 맸던 가방을 다시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그냥 그 자리에 다시 앉았다. 어차피 몇 페이지 안남았는데, 뭐. 이것만 다 읽고. 거의 다 끝나가니까.... 나는 계속 페이지를 넘겼다. 뒷표지에 가까워 질수록 계속. 그리 두꺼운 책이 아니었는데도 페이지가 끝없이 이어진다.
이것만 다 읽으면 끝날 것 같은데....... 거의 다 읽어가는 것 같은데......
그래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세르비아의 소설가 조란 지브코비치는 이 책 <환상도서관> (영제; The library)로 2003년 세계환상문학대상을 받았다. '세르비아'라는 정치적 한계 때문에 세계의 주목이 조금 늦긴 했지만, 조란 지브코비치는 16권 이상의 책을 출간한 중견 작가이며 유럽권과 영미권에 걸쳐 다양한 문학상을 석권한 대단한 작가이기도 하다. 새로운 보르헤스라는 찬사를 들으며 라틴문학의 대표주자로 인정받고 있는 그의 글은 신기하고 익살스러우면서도 씁쓸하다. 마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독일군에게 잡혀가는 처절한 상황을 아들에게 코미디로 인식하게끔 연출했던 아버지의 몸짓을 보는것처럼 재미와 함께 어딘가 간절하고 서글픈 데가 있다.
'도서관'이라는 주제로 엮인 6개의 단편이 모여있는 <환상도서관>은 조란 지브코비치의 노련하고 기발한 매력이 흠뻑 느껴지는 작품이다. 지적이고 기발한, 유쾌하고 명석한 작가의 글은 이렇게도 재미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멋진 책이다. 무엇보다 '책'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과 애증에 대해 여러가지 시선으로 그려내 읽는 내내 공감과 동경을 멈출 수가 없다. 이 공감과 동경은 책 속의 주인공들을 향한 것이기도 하고 작가를 향한 것이기도 한데, 나는 단연코 확신한다. 당신도 책벌레라고? <환상도서관>을 읽게 된다면 나와 같은 공감과 동경 혹은 그 이상의 어떤 것을 책에서 발견할 것이다.

가상 도서관, 집안 도서관, 야간 도서관, 지옥 도서관, 초소형 도서관, 위대한 도서관...... 모든 이야기마다 '책'을 사랑하는 열렬한 독자가 가지고 있는 그리고 '책'을 쓰는 곤핍한 작가가 가지고 있는 로망들이 그득그득 실려있다. 죄인들이 영원토록 책을 읽어야 한다는 지옥도서관은 나에겐 차라리 천국같고 매번 책장을 열때마다 누구도 보지 못했던 새로운 이야기들이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초소형 도서관은 작가라면 모두 한번쯤 꿈에서 찾아 헤매었을 법한 엄청난 아이템이다. 세상에, 조란 지브코비치는 나에게 이야기만 책에 담은 게 아니라 그를 움직이게 하는 영감과 동기도 함께 책 속에 넣어둔 모양이다. 그의 글을 읽으며 달궈진 손가락이 제멋대로 키보드를 움직이니까. 그래서 슬며시 웃음이 난다.
혹시 당신도 책벌레인가? 주말에 읽을 책이 없으면 견딜 수 없이 불안하고 도서관 사서가 얼굴을 알아볼 정도로 도서관 애용자인가? 엄청난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해 좀비처럼 소재를 갈구하며 이 책 저 책을 뒤지는 빈곤한 작가인가? 어느 쪽이든 당신이 책벌레라면 이미 환상도서관에 당신의 자리가 있다. 넘실대는 활자에 몸을 싣고 환상도서관 안으로 들어오기만 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