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애플 스트리트
제니 잭슨 지음, 이영아 옮김 / 소소의책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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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파인애플이지?

이 책 표지를 볼 때부터 그게 궁금했다.

00 스트리트라고 지명된 미국 주소지 중에 파인애플 스트리트가 있던가? 너무 생소했다.


소설의 배경도 그랬다. 금수저 가문의 장녀와 차녀 그리고 며느리인 여자들의 이야기는 나한테는 낯설다. 드라마 [상속자들]이나 [꽃보다 남자] 같은 류는 굳이 안 찾아보는 정도가 아니라 진저리를 내며 멀리하는 취향이라 그렇다. 근데 이건 내 취향이 고상해서가 아니라 금수저들이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어떤 프레임이나 고정된 이미지가 나한테 있어서다. 저런 소재로는 결국 저런 뻔한 이야기를 하겠지, 라는 짐작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짐작이라는 건 사실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은 안 된다. 오히려 버리는 편이 더 낫다.

소설 [파인애플 스트리트]는 누구나 하는 이 짐작,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신만의 고정된 이미지가 나와 타자와의 관계를 어렵고 불편하게 만든다는 걸 보여준다.


부동산 재벌인 스톡턴 가문의 장녀 달리는 미국계 한인 2세인 맬컴 김과 결혼했다. 맬컴의 집요하다싶을 정도의 분석력과 명석함, 다정함과 성실함에 그녀의 인생을 걸었다. 달리는 결혼과 함께 집안의 재산을 포기하고, 출산과 함께 그녀의 커리어도 포기했다. 그게 맬컴을 사랑하는 자신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공가도를 달리던 맬컴이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달리는 생각을 고쳐먹는다. '인종과 인맥으로 내 남자의 앞길이 가로막혔을 때, 내가 그걸 물리쳐낼 정도로 성공한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훌륭한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뒤를 봐줄 백인 아빠가 없어서 타인의 실책까지 뒤집어 써야 하는 동양인이 겪는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과 유리 천장을 포착하고 고발하는 게 부유한 재벌가의 백인 여성이라니. 아, 이 소설이 재미는 여기에 있다. 온통 백인들에 둘러싸여 무엇이 프레임이고, 무엇이 차별인지 알지도 못하고 알아야 할 필요도 없었던 상류층 백인 여성은 동양인과의 결혼과 출산을 겪으며 깨달아간다. 여성이, 특히 아이를 낳고 기르는 여성이 사회적으로 어떤 어려움과 벽에 부딪히는지를 느끼고 동양인이 미국 사회 내에서 암묵적으로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를 깨닫는다. 첫째를 낳았을 때까지는 직장에 다녔지만 연년생 둘째를 낳으면서 도저히 직장 생활을 이어갈 수 없었던 달리는 결국 두 아이를 기르는 데에 전념하기로 선택했다. 그러나 그런 선택 이후에도 그녀는 내내 수많은 돈을 들여 대학원까지 나온 자기 자신이 결국 주부가 되었다는 자괴감을 떨치지 못하고 스스로를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며 부끄러워했다. 그랬던 그녀가 맬컴이 회사에서 해고되면서 각성한다. 맬컴이 받는 차별에, 혼혈아인 그들의 아이들이 받는 시선에 진저리를 낸다. 그리고 결국 맬컴이 이전보다 더 영향력 있는 위치로 올라서는 데에 결정적인 계기를 만든다. 달리, 멋지다!!!

이 소설에는 달리와 함께 스톡턴 가문의 막내인 조지애나, 며느리인 사샤가 등장하는데 이 세 인물 중에 나의 베스트는 달리다. 소설을 읽는 내내 진짜 멋지고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맬컴이 하루아침에 업계의 명망을 다 잃고 백수가 되었을 때, 그들이 누리던 부유한 생활이 지속될 수 없는 위기에 놓였을 때, 남편을 원망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그가 당한 부당한 처우에 억울해하고 저항한다. 맬컴이 다시 하늘로 날아오르도록, 그녀가 가진 자산을 모두 동원하여 기회를 만든다. 무엇보다 가장 멋졌던 부분이 맬컴의 해고 이후 달리가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장면이었다.


'바꾸고 싶은 일이 참 많았다. 멜컴에게 혼전합의서 서명을 받아낼걸 그랬다. 부모님에게 파인애플 스트리트의 집을 갖고 싶다고 말할걸. 여동생을 좀 더 주의 깊게 지켜볼걸. 해처를 임신했을 때 일을 그만두지 않고 커낼 스트리트 지하철역의 쓰레기에 매일 아침 토해버릴걸. 동료들이 암소 울음소리를 흉내 내든 말든 모유 보냉 가방을 들고 사무실로 들어갈걸. 경력을 쌓고 그녀만의 소득을 올려, 어느 멍청한 애송이의 실수로 남편의 앞길을 막아버린 인종차별적이고 족벌주의적인 시스템에 휘둘리지 않을 만큼 성공할걸.

책 298쪽


강한 사람이구나, 이 사람은. 이 장면에서 나는 그걸 정확하게 느꼈다. 달리는 그저 감성적이고 느슨한 사람이어서 멜컴에게 혼전합의서(결혼 이후 그녀 가문의 재산 처리에 관한 합의서. 쉽게 말해 예비 배우자는 그들의 재산에 간섭할 권한이 없다는 내용을 명문화 한거라고 나는 이해했다.)에 서명을 요구하지 않은 게 아니다. 사랑이 너무나 중요해서 그녀의 재산과 커리어를 포기한 게 아니다. 살아온 나날 동안, 그녀는 어떤 일이든 날을 세우고 달려들지 않아도 되었다. 수모와 모욕을 견뎌야 할 일이 없었다. 달리는 더 중요한 것들을 위하여 다른 것들은 미련 없이 놓아주는 걸 배운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에게 자신의 두 아이를 굳이 혼혈아라 구별하여 취급하는 일은 낯설었고, 맬컴이 당하는 일은 모욕적이었다. 수모와 모욕의 사건들이 이어지자 그녀는 알게된 것이다. 인생의 어느 순간에는 자신이 바라는 것을 솔직하고 노골적으로, 뻔뻔하고 대담하게 쟁취해야 한다는 걸. 그리고 이후에 그녀는 깨달은 대로 움직였다.


또 다른 주인공인 사샤는 미국의 평범한 중산층에서 자랐다. 유쾌하고 소탈한 코드를 우연히 알게 되어 사랑을 하게 되었고, 결혼까지 했다. 문제는 코드가 엄청난 재산을 가진 스톡턴 가문의 장남이라는 데에 있었다. 결혼을 앞둔 어느 날 스톡턴 가문의 변호사라는 사람이 찾아와 혼전합의서에 서명해야 한다며 문서를 안기고 갔다면? 내 예비 신랑은 이 개떡같은 혼전합의서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없었다면? 그래놓고 '그거 그냥 아무 변호사한테 맡기고 너는 서명만 하면 돼'라는 무심한 태도로 일관한다면? 나 같아도 분기탱천하여 한 달 내내 싸웠을 거다. 사샤가 코드와 혼전합의서를 두고 말다툼하는 장면에서, 코드가 혼전합의서는 결혼이라는 제도에 으레 딸려오는 것이며 별 것도 아니라고 하자 사샤가 '너가 사는 세상에서나 그렇지. 내가 사는 세상에서는 아니야! 우리 엄마 아빠가 혼전합의서 같은 걸 주고 받았을 거 같어?!'라고 일갈하는데 내속이 다 후련. 그니까!! 그건 너네들 세상에서 그런 거라고! 그런데 이후에 차분하게 생각을 해보면, 이 갈등은 서로 다른 세계와 세계가 만난 충돌음이다. 코드의 세상이 기이하고 사샤의 세상이 옳다는 분별이 아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 하는 가치판단이 아니라, 서로 다름의 문제.

처음에는 작가가 재벌가의 며느리가 된 사샤가 겪는 크고 작은 어려움을 보여주며 재벌가의 이상한 관행을 꼬집고 싶은 거였나?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사샤는 사샤대로, 코드와 결혼하면서 여전히 자신의 세계를 고집한다. 사샤는 스톡턴 가문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파인애플 스트리트의 저택을 처음부터 싫어했다. 박물관이나 다름없는 그곳을 조금씩 조금씩 자신만의 입맛대로 뜯어고치고 싶어했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고 그걸 언짢아하는 코드의 가족들을 언짢아했다. 코드 그리고 코드의 가족들과도 갈등이 극에 달한 그 때, 자신의 고향집으로 내려간 사샤는 거기서 깨닫는다. 가족이란 결혼이라는 제도로 묶인다고,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엮인다고 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열 때 비로소 거기가 출발점이 된다는 사실.

사실 아무리 소설이긴 해도 코드와 사샤가 너무 이상적인 커플이라, 이 둘의 이야기는 좀 심심하게 읽었다. 일단 코드가 너무 유니콘이라. 아무리 소설이어도 이 정도 유니콘이면 몰입이 안 된다. 사샤는, 처음에는 정말 평범한 집안의 평범한 여자인 줄 알았는데 읽다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나름 빚 없이 사는 가족들인데다 사샤 본인의 능력이 무척 출중하다. 아, 이 정도 여자니까 스톡턴 가문의 일원이 되면서 그렇게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거였겠지. 아, 이렇게 쓰면 스톡턴 가문이 사샤를 엄청나게 괄시를 하고 못되게 군 것 같지만, 소설 초반까지는 그렇게 보이지만 사실은 아니다. 그들은 단언컨대 악의가 없었다. 그들도, 사샤도 정말로 서로를 몰라서 그런 상황들이 생겨난 것뿐.



조지아나는 할말하않. 소설을 읽으면서 발암캐릭터라고 느끼는 인물은 적지 않은데 보통은 어느 기점에서 그들의 선택과 행동이 이해가 가는 상황이 생겨 그렇게 밉지는 않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조지아나는 끝까지 밉상이다. 나한테는 그렇다. 얘는 낼 모레 서른이면서 왜 이렇게 철이 없을까. 무엇보다 작가가 이 인물의 서사를 풀어나가는 데 쓴 요소들에 정말 공감이 1도 안 간다. 불륜에 사별 그리고 느닷없이 자선사업에 뛰어든다고? 브래디가 유부남인 줄 알면서도 그의 침대로 뛰어든 선택에 뜨악했던 나라, 그 이후에 전개되는 조지아나의 이야기는 너무 괴롭고 불편했다. 특히 사별의 아픔을 주체하지 못해서 방황하던 조지아나가 사샤의 젠더리빌 파티에서 갑자기 분노의 화살을 사샤에게 돌리면서, 꽃뱀이니 어쩌니 하는 장면은 정말 경악스러웠다. 이 정도로 철이 없는 인간으로 묘사한다고?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 소설은 재밌다. 달리에 대해서는 더 쓸말이 남았을 정도로 너무 좋고, 천재와 사이코패스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틸다(달리의 엄마)도 흥미롭고, 무엇보다 맬컴의 엄마인 순자!!!!! 순자가 정말 궁금하다. 소설의 결말에는 라임스톤 저택에 달리와 맬컴 가족 그리고 맬컴의 부모님들이 함께 살게 되는데, 거기서 벌어지는 일들도 너무 궁금하다. 과연 김씨 부부와 스톡턴 부부 사이엔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작가가 이걸 후속으로 써주면 좋겠다. 미국 사회의 뿌리 깊은 인종차별과 성차별,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불통과 선입견, 그리고 편견과 무례함에 대하여 [파인애플 스트리트]에 담아냈던 것처럼 경쾌하고 재미있게, 그 다음 이야기가 이어지기를 바란다.

아참, 파인애플 스트리트가 왜 파인애플이냐고? 파인애플은 콜럼버스가 스페인 왕에게 바치려고 브라질에서 가져온 과일이었다. 파인애플의 등장 자체가 최고 엘리트층을 위한 특급 과일이었던 셈이다. 별스런 모양으로, 환영과 환대를 상징하는 과일로 알려졌지만 파인애플은 사실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상징이라고, 이 책은 귀뜸해준다.



력을 쌓고 그녀만의 소득을 올려, 어느 멍청한 애송이의 실수로 남편의 앞길을 막아버린 인종차별적이고 족벌주의적인 시스템에 휘둘리지 않을 만큼 성공할걸 -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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