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가 - 타인 지향적 삶과 이별하는 자기 돌봄의 인류학 수업 서가명강 시리즈 28
이현정 지음 / 21세기북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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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한창 돌아다니던 이미지가 하나 기억이 난다. 키가 크고 작은 세 명의 사람이 울타리 건너 먼 곳을 구경하고 싶어한다. 이 세 명에게 각각 똑같은 높이의 발판을 주는 것과 세 명의 신장이 서로 다르니 각자의 신장을 고려하여 각각 다른 높이의 발판을 주는 것.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평등일까? 사람들의 의견을 묻자면 제각각 자기의 배경과 관점에서만 이야기하니 우리에게는 믿을만한 기준이 하나 필요하다. 헌법 그리고 헌법재판소라는 기준이면 아주 믿을만한 기준 아닐까?



헌법재판소는 우리나라 헌법이 지향하는 ‘평등’을 ‘실질적 평등’으로 해석하고 있다. 실질적 평등은 모두를 ‘똑같이’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은 다르게’ 대하라는, 즉 차이에 대한 존중이 평등의 본질임을 밝힌다.

책 146쪽



평등을 논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점'을 알아야 한다. 너와 나의 다른 점을 알지 못하면 나는 나 좋을대로 너를 대하고 너는 너 편한대로 나를 대하게 된다. 그러면서 나를 대하듯 너를 대했으니 이건 평등이라고 오해를 하게 되고 이런 오해가 쌓이면 결국 관계는 망가진다. 다른 것을 제대로 알고 제대로 다르게 대해야 우리는 진짜 평등해지고 그런 평등한 관계야말로 모두가 꿈꾸는 지향점 아닌가. 우리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같은 부분으로 하나가 되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르기 때문에, 다르다는 그 지점으로 하나가 된다. 이 세상에는 같은 사람이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교수인 이현정 저자가 지은 [우리는 왜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가]는 서로의 다른 점을 알지 못하는 2023년 한국의 구성원 모두를 위한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며 이현정 교수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왜 대한민국의 취업이나 출산율 정책이 이렇게 무용하게 진행되는지, 왜 이렇게 우리는 지역과 성별과 나이에 따라 갈기갈기 찢어져 다투고 있는지 그 근본적인 원인을 이해하게 된다.


예를 들면 젠더 논쟁. 지금 이순간 대한민국 사회에서 가장 첨예한 이슈는 젠더 논쟁이다. 뉴스 댓글이나 포털 게시판 등에서 벌어지는 논쟁을 들여다보면 위에서 이야기한 평등의 개념이 희박한 우리의 현재를 확인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점을 다르게 대하는 실질적 평등이 아닌, 다른 점이 어떻든 간에 똑같이 대우하는 형식적 평등을 중심으로만 의견이 오고간다. 각자의 경험과 배경에서만 세상을 판단하는 게 인간의 한계인 것은 맞지만 적어도 상대가 나와 무엇이 다른지를 안다면 아니, 다른 점을 찾고 들여다보려는 최소한의 노력이 있다면 우리의 소모적인 논쟁은 원만한 이해와 협력의 단계로 방향을 돌릴 수 있지 않을까?



남편이 치매에 걸린 여성을 모아 초점 집단을 만들어 집단 토론을 하게 했다. 이들이 남편을 돌보는 데 가장 어려운 점은 남편의 불같은 화 또는 폭력이라고 고백했는데,...(중략) 137쪽


반면 남성의 경우 아내의 치매로 가장 어려운 점은 아내가 식사 시간을 잊고 끼니를 제대로 챙겨주지 않는다는 것을 언급했다. 두 결과를 놓고 보자니 슬프면서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138쪽



30,40대 남성을 조사해보면 여성이 차별을 받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상당수가 동의하는 입장을 보이는데, 그들은 사회 생활을 통해 여성의 임금 수준이나 대우에서 차별받고 있다는 것을 명명백백 알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20대 남성의 경우 사회에 진입하지 않은 상황에서 군대 문제를 직면하며 젠더 문제를 받아들인다.

142쪽



한국에서 젠더 논쟁이 뜨거울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성별에 따른 고정 역할이 무너지면서 가장 빠르게 해체되고 있는 게 전통적인 '가족'이라는 단위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더 이상 가족은 희생과 헌신의 가치로 유지되는 집단이 아니게 되었다. 이현정 저자는 요즘 젊은 세대는 가족이 자신의 필요와 성장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가족으로서 함께할 이유가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굳이 가족을 위해 개인이 희생해야 한다고 여기지 않는다(193쪽)고 언급하며 가족생활이 가치 추구나 사랑보다는 물질적, 기능적으로 도구화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우려된다고 했다(193쪽).


한국은 전쟁 이후 잿더미가 된 한반도라는 터 위에서, 개발과 결과만을 중시하고 원리 원칙이나 안전, 인간성은 모두 외면한 거친 성장기를 보냈다. 거칠고 불안한 사회 속에서 개인이 기댈 곳은 오직 유일하게 '가족'뿐이었고 이 때문에 가족은 가족 구성원 모두가 철저히 지키고 희생해야 하는 신성한 집단이었다. 그러나 개인주의와 물질주의가 깊어지면서 이제는 가족마저도 물질적, 기능적으로 이득이 되지 않는다면 필요없어진 것이다. 여럿이 살아도, 혼자 살아도 불편하고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라면 차라리 혼자 살거나 뜻이 맞는 친구 정도나 반려동물과 함께 있겠다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



이는 무엇보다 ‘생존’ 조건의 향상과 ‘생활’의 풍요가 결코 물질적으로 측정될 수 없으며, 오히려 정신적인 고통을 더 심각하게 느끼도록 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중략) 삶은 물질적인 측면으로만 구성되지 않는다. 정신적 영역, 관계적 영역, 역사적 경험의 축적 등 다양한 영역의 혼합으로 이루어진다.

책 44쪽



그러나 저자가 책에서 언급한 대로, 사람은 생존 그 자체에만 목적을 두고 사는 존재가 아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 중 유일하게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하여 평생을 고뇌하는 게 사람 아닌가. 때문에 우리가 매일 매일 보내는 시간, 태어나면서부터 맺는 여러 관계들을 물질적, 기능적으로만 재단하고 대한민국의 성장기가 그랬던 것처럼 이윤과 효율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과연 우리는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처음에는 타인의 욕망을 마치 나의 욕망인 것처럼 투사하여 타인의 시선에 얽매여 진정한 자유 없이 살아가는 우리들의 현재를 고발하는 책인 줄 알았다. 하지만 [우리는 왜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가]는 내 기대보다 훨씬 더 폭넓고 복잡한 이야기를 전달한다. 왜곡된 나의 욕망을 직시하기 위해서는 왜곡된 한국 사회의 잣대와 너무나 고정적이고 획일화된 사회적 기준을 그리고 이것들이 오늘날에 이르게 된 역사와 배경을 알아야 하기 때문일까? 진정한 자기 돌봄에 가까이 가기 위하여 내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에 대한 답을 들려주기 보다는 나를 비롯한 한국 사회 구성원들이 2023년을 작년과 같은 온갖 갈등과 논쟁의 해로 소모하지 않도록 '반드시 함께 풀어보세요~!'라고 미주가 달려 있는 듯한 질문들을 던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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