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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시대정신이 되다 - 낯선 세계를 상상하고 현실의 답을 찾는 문학의 힘 ㅣ 서가명강 시리즈 27
이동신 지음 / 21세기북스 / 2022년 11월
평점 :
어릴 때 내가 좋아하던 비디오 장르는 무협이었다. 30~40편짜리 장편 무협드라마에는 아주 환장을 했다. 조금 더 자라서는 판타지 소설에 푹 빠졌다. 그렇게 재미있는 게 또 어딨을까? 닥치는 대로 장편물을 해치웠다. 그러다 어느 날, SF를 만났다.
가장 처음 만난 SF는 스타트랙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나에게 SF는 스타트랙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 장르다. 누구도 가보지 못한 낯선 세상, 지구라는 작은 별을 뒤덮은 바다 따위는 비교도 할수 없이 무한으로 펼쳐진 우주를 누비는 항해. 나에게만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때는 스타트랙을 시작으로 갖가지 SF 드라마와 영화들이 봇물처럼 쏟아져내리듯 시청자를 공략하던 때였다.
그렇게 무심코 읽고 보고 즐겨 왔던 SF가 단지 한때의 공상이 아니라 실상으로, 현재의 분명한 모습으로 다가와 있다는 걸 깨닫는 건 나에겐 조금 무서운 일이었다. 왜냐면 내가 기억하는 SF 장르의 영화, 소설, 드라마 등등은 결말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릴 때 봤던 SF 만화 중에 아직도 충격적인 위기감을 주는 장면들은 환경오염으로 멸망한 지구, 기후변화로 인해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은 사람들, 완전히 사막화된 지구에서 모래쥐처럼 살아가는 인류 같은 것들이다. 그래서 내가 보았던 SF 소설이나 영화에서 등장한 장면들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현실이 되었다는 걸 알아채는 순간들은 신기한 동시에 불안하다.
수십년 전부터 미래의 재앙을 그려냈던 SF. 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간, 살아보지 못한 세계를 그리되 결국 현실과 이어지고야 마는 이 문제적 장르.
이동신 교수는 이제는 SF를 어떻게 읽고, 거기서 무엇을 건질 것인지를 묻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건데, 생각보다 SF라는 장르는 무척 어렵다. 무척이나 어렵다. 왜 어렵냐면 이 장르가 시작되는 그 지점, 이 장르가 해야할 이야기들을 모두 발산하고 끝을 맺는 그 지점들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우리가 익숙하게 느끼고 생각하고 사고하는 그런 지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나온 말을 빌리자면 '기존의 지식체계가 아닌 그 너머의 사변'에서 SF는 시작하여 끝을 맺는다.
그래서 그렇구나! 무협과 판타지를 좋아하던 내가 SF를 접할 때마다 느꼈던 생소함, 기이함은 그것이 진짜 SF다운
SF였기에 느낄 수 있었다는 걸 이제서야 알았다. 나는 실은, 내가 과학을 싫어해서 SF마저 불편하게 느끼는 구나 싶어서 스스로에게 실망을 좀 했었는데, 그게 아니라고 뒤늦은 위로를 해본다.
서가명강 시리즈를 읽을 때마다 이 시리즈는 독자를 한 명의 청강자로 두고 책 전체의 강연 내용을 최대한 잘 흡수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책의 가장 첫 페이지에 해당 도서가 다루고 있는 학문의 영역을 도식화해서 보여준다던지, 해당 도서를 읽는 동안 머릿속에 가지고 있어야 할 개념들을 미리 정리해 앞에서 다 보여주고 책을 시작한다던지 하는 점들은 정말 출판사가 고마울 정도다. 덕분에 우주선과 외계인 소재의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즐길 줄만 알았지 SF 자체에 대한 이해는 거의 전무했던 독자 하나에게 빛을 주었으니까.
[SF, 시대정신이 되다]라는 제목 때문에 SF 장르를 좋아하거나 즐기는 사람에게만 이 책이 눈에 띌까 싶다. 이 책은 SF장르 자체에 대한 호감도를 떠나 '현재의 지구와 인류'에 대해 먼지만큼이라도 걱정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권할만한 책이다. SF가 어떤 장르인가에 대한 책이라기 보다, '인류 공통의 위기를 맞은 지금 우리 시대의 문학과 문화 속에서 어떤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책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문화를 생산하고 누군가는 문화를 소비한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생산자에게 윤리, 시대정신, 가치성 있는 주제의식을 요구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 이동신 교수는 생산자가 그런 사명감이 없이 생산했다고 해도 괜찮다고 한다. 더 중요한 건 생산자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소비자, 책으로 치자면 독자다. 독자가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읽는다면, 생산자인 작가들이 결국 그 변화를 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 세상이 험하고, 혼란할수록 문화의 소비자들은 더 예리하고 수준 높은 안목으로 문화를 읽어내야 한다. 오늘 당장 비닐 한 장 덜 쓰는 것도 너무나 필요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가 저마다 예리한 독자, 소비자가 되어가는 것 역시 지금의 위기와 혼란에서 우리 스스로를 구제할 수 있는 길일 것도 같다.
작가들이 그런 사명감을 갖고 쓰지 않았다고 해도 괜찮다. 왜냐하면 독자인 우리가 그런 사명감을 갖고 읽으면 되기 때문이다. 독자가 달라진다면 작가들도 그 변화를 점차 따라오게 된다. SF는 그렇게 독자와 작가가 함께 만들어가는 장르다.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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