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역사 - 시대를 품고 삶을 읊다
존 캐리 지음, 김선형 옮김 / 소소의책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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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을 읽는다고 하면 대번에 '오~~~' 이런 반응을 얻곤 한다. 최근에 발표된 작품은 아니고 적게는 30~40년, 많게는 몇 천 년 전에 세상에 나온 시들을 좋아한다고 하면 '아, 진짜?' 와 함께, 내가 좋아하는 시들과 내가 비슷한 나이인 것처럼 나를 바라보는 표정도 만날 수 있다. 


 이상하게 요즘 출간되는 시들은 마음이 가지 않는데 나와 나이가 비슷하거나,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시들은 그렇게 좋을수가 없다. 애늙은일 태어나고 자란 천성때문인지 어쩐지는 모르겠다. 다만 무형의 어떤 것들을 언어로 뭉쳐 시로 만들어 놓은 작품들을 보면, 그런 싯구들을 읽다보면 탄성이 절로 나고 박카스 몇 사발을 들이킨 것처럼 마음이 시원하다. 누군가는 시가 정적이고 따분하다고 느낄 수 있으나 정말 잘 빚은 시들은 롤러코스터와 방불한다. 정신과 마음이 중력을 벗어나 위, 아래, 동서남북으로 왔다갔다 한다. 




 소소의책 출판사에서 펴낸 [시의 역사]는 시의 재미를 아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책이다. 시를 많이 알지 못해도, 시에 익숙하지 않아도 괜찮다. 시가 주는 재미, 시 언어의 그 감칠맛을 느낄 줄 안다면 이 책도 필히 재미있을 것이다. 

 첫 페이지를 읽기도 전에 두툼한 책 두께에 기함할 수 있는데 겁내지 마시길. 그만큼 많은 시와 시인들이 이 한 권에 실려 있다.



 이 책을 지은이는 옥스포드 대학 영문학 교수다. 그 흔한 저자의 여는 글, 펴는 글, 시작하며 등등의 프롤로그 없이 목차 끝나면 곧바로 첫 챕터부터 시작된다. 저자가 무척이나 할 말이 많구나. 말이 없어도 확실히 알 수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부터 현대 영시까지, 수 천 년에 걸친 영어권 시와 그 작품들을 쓴 시인들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하니 한 문장, 한 쪽이라도 바쁘지 않을 수 없다. 

 책은 정말 많은 시 작품과 시인들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는데, 이게 어느 정도냐면, 이 책 뒤에 관련한 자료 수록을 감사하며 작품의 발표자와 발표 매체들을 일일이 적어둔 부분이 있는데 이 내용의 양이 9쪽을 넘는다. 여하간..... 진짜 많다. 이 정도로 많은 시 작품과 시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니만큼 한번쯤 이름을 들어봤던 시인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호메로스, 사포부터 시작해서 단테, 초서, 셰익스피어, 허버트, 워즈워스, 키츠, 바이런, 푸시킨, 휘트먼, 랭보, 오스카 와일드, 프로스트, 예이츠, 엘리엇. 동서양에 널리 알려진 시인 외에 나로서는 처음 만나는 시인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샬럿 뮤의 시는 읽자마자 '우와, 천재구나.' 싶었다. 




뮤의 시들은 기술적으로는 전위적이며 독창적이고 감정적으로는 심오하다. 가장 훌륭한 시로 꼽히는 작품으로는 [교회의 매들라인]과 [나무들이 쓰러졌네]가 있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초고의 걸작은 [농부의 신부]다. 섹스를 끔찍하게 무서워하는 젊은 아내를 둔 남자가 이 시의 화자다.


저 위 다락방에 혼자서, 잔다오.

불쌍한 여자. 우리 사이에는

계단 하나밖에 없는데. 아! 맙소사! 그 솜털,

부드럽고 젊은 그녀의 솜털, 갈색,

그녀의 그 갈색- 그녀의 눈, 그녀의 머리카락, 머리카락이라니!

She sleeps up in the attic there

Alone, poor maid, ‘Tis but a stair

Betwixt us. Oh! my God! the down,

The soft young down of her the brown,

The brown of her-her eyes, her hair her hair!

311-312쪽


 


이 책은 극작가로 너무도 유명한 셰익스피어가 남긴 소네트도 잠시 소개하고 있는데, 그가 남긴 소네트를 읽어보면 왜 시가 그토록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장르인지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 



남김없이 짚단으로 묶인 여름의 녹음은

하얗고 까슬까슬한 수염이 나서 장례 마차에 실려 가네.

summer’s green, all girded up in sheaves,

Borne on the bier with white and bristly beard.

85쪽



 여름 녹음이라는 추상은 하얗고 까슬까슬한 수염, 묶인 짚단으로 이미지화되어 손에 잡히는, 촉감마저 느껴지는 구체적인 형상이 된다. (셰익스피어.... 굉장해. 굉장해) 동시에 푸른 청춘이었던 사람이 늙고 병들어 장례 마차에 실려가는 인간의 지극한 전철까지 연상시킨다. 이 짧은 두 줄의 문장은 읽는 이의 정신을 끌고 광속보다 빠르게 이미지를 확장한다. 

 저자는 길가메시 서사시로부터 시의 역사에 대한 긴 이야기를 시작하는 첫 챕터에서 시인은 죽어도 시는 죽지 않는 시의 신비를 언급했다. 



어떤 시들은 죽지 않고 인간 수명의 한계를 훌쩍 넘어 오래도록 살아남는다. 어째서 그러한가는 수수께끼다. 날마다 눈사태처럼 우리를 무서운 속도로 덮치고 흘러가는 망망한 언어 속에서 시인이 몇 개의 단어를 골라 일정한 순서에 따라 배열하는 것으로 죽음을 넘어서는 예술을 창조한다니 어떻게 된 일일까? 지금까지 아무도 이 신비를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나 모든 시인은 이 목표를 추구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금세 잊힐 거라면 무엇하러 고생스럽게 시를 쓰고 고심해서 완벽하게 다듬는단 말인가? 시인이 우리에게 만물은 재로 돌아간다고 말할 때마저도 시는 재로 돌아가지 않고 영원히 살아남고자 한다.

18쪽




 모든 시가 그런 것은 아니나, 오래도록 살아 남는 시에는 분명 특별한 것이 있다. 뮤의 시, 셰익스피어의 시가 그렇다. 형체가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그것들을 언어로 붙잡아 독자 앞에 데려다 놓고, 독자마저 시인이 느꼈던 그것, 그 강렬한 혹은 분명한 그것에 동화되도록 만든다.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표현이 무척 진부하고 고리타분하고 심지어 따분하지만, 이런 시들을 지은 시인에게는 저런 표현을 쓰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렇다 보니 시는 언어, 자국어를 벗어나면 순식간에 본연이 가졌던 힘을 잃고 만다. 삼손이 머리카락이 잘린 후에 힘을 쓰지 못하는 것처럼, 원작의 언어를 떠나 타국으로 옮겨간 시는 시가 아니라 말의 나열로 전락하기 쉽다. 모든 번역이 그렇겠지만 특히 시를 번역하는 일은 그래서 무척 어려우리라. 이 책을 옮긴이 역시 옮긴이의 말에서 '처음부터 실패할 수 없는 작업이 아닐 수 없었다'고 말한다. 


 더구나 이 책은 한국의 시, 많이 봐줘서 아시아의 시도 아닌 영어권의 시의 역사다. 그것도 대부분이 영국의 시다. 그래서 이 책에 실린 시와 시인들에 대한 내용을 읽다보면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으나 '아, 그래?' 정도에서 그치고 마는 내용도 더러 있다. 


그래서 이 책은 펴낸이의 말이 아니라 옮긴이의 말을 먼저 읽고 첫 챕터를 읽어보기를 권한다. 책의 역자(김선형)는 영어권 시의 역사를 집대성한 이 책이 한국 독자들에게 어떤 것을 전해 줄 수 있는지를 [옮긴이의 말]에 남겼다. 한 편의 시를 여러 번 곱씹으며 그 시의 깊이를 충분히 음미하는 것도 좋은 방법인데, 이렇게 다른 언어의 시, 훌륭한 작품과 구절들만을 모은 이런 책을 읽으며 시가 시간을 초월할 뿐 아니라 (번역자의 엄청난 노력에 힘입어) 문자를 초월하기도 한다는 것을 경험해보는 것도 각별한 일이다. 




 온전히 이해하는 게 불가능하더라도, 원래의 형태를 잃고 해체되어 재조립된, 복제된 언어의 직조물이라고 해도 언제나 타자를, 타 문화를, 타 언어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5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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