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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지붕 한 가족 1부 - 사연 없이 여기에 온 사람은 없다
황경호 지음 / 행복에너지 / 2019년 7월
평점 :
할아버지가 만주에서 시계공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릴 때, 할아버지 댁엘 가면 시계 밑판이라든지 자잘한 시계침이나 톱니라든지 하는 부속들이 굴러다니곤 했는데 젊은 할아버지의 청춘 시절을 듣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만주 시절을 좀더 자세히 듣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할아버지는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셨고 할머니도 돌아가신데다 할아버지는 만주 시절에 대해 말씀을 많이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도 시계공인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신다고 하셨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일제 강점기의 만주란 나와 동떨어진 아득한 세계가 아니라 나와 긴밀하게 연결된 특별한 세계로 느껴진 일이. 내가 알지 못하는 그러나 혈육으로 이어진 끈끈한 역사가 거기 깃들어 있는 것 같이 느꼈고, 지금도 그렇다. [네 지붕 한 가족]이라는 소설과 만나게 된 인연은 그 시절 만주에 대한 나의 향수와 환타지 덕분 아닌가 한다.
[네 지붕 한 가족]은 고향을 떠나 각자의 궤적을 그리다 만주 봉천에서 해후한 범호와 범진 형제, 희망이 사라진 시절에 한가닥 지푸라기를 따라 만주 봉천에 흘러든 영덕 등 1930년대의 만주에 모인 여러 인물들의 생사고락을 그린 소설이다. 400여 장의 1부와 2부, 두 권으로 구성된 [네 지붕 한 가족]은 그야말로 만주의 조선인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서사시다. 주인공인 인물들 외에 준길, 장밍, 호영, 은심 등 남녀노소 여러 인물 군상이 마치 모자이크처럼 서로 엮이고 연결되어 '만주의 조선인들'이라는 커다란 그림을 그린다.
[네 지붕 한 가족]이 특별한 점은 서정적인 제목과는 달리 마치 다큐멘터리 같은 시선으로 인물들을 따라간다는 점이다. 어느 시대의 어느 인생인들 고생스럽지 않은 자 있겠냐마는, 1930년대의 조선인들의 인생이란 기구하단 말로는 다 못할 인생들이 아니었겠나. 몇 달 전에 1800년대 후반에서 1900년대 초반까지 러시아로 이주한 조선인들의 정착과 독립운동에 대한 책을 읽고 나서 그 여운이 무척이나 깊고 오래 갔던 기억이 난다. 힘을 잃은 나라의 백성에게 갈 곳은 없다. 살아갈 만한 곳도, 살 수 있는 곳도 없다. 그러니 조선 땅에서도, 러시아에서도 만주에서도 우리 민초들의 삶은 그야말로 살아남기 위한 투쟁일 수밖에. [네 지붕 한 가족]은 그러한 민초들의 고군분투를 당시의 정세와 함께 세밀하게 그려냈다.
[네 지붕 한 가족] 저자의 이력이 무척 특이하다. 99년부터 중국 주재원으로 근무를 시작한 황경호 저자는 중국 CJ그룹과 오리온 그룹 등을 거치며 20 년 동안 근무해왔다고 한다. 영업 관리 업무를 해온 덕으로 중국의 동쪽 끝 러시아 접경 지역부터 서쪽 끝 우루무치까지 누볐다고 한다. 현재도 중국 북경에 거주하며 일하고 있다니 2000년 대의 저자가 발견한 1900년대의 역사가 [네 지붕 한 가족]을 빚은 바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에 들어서 느끼는 건, 우리나라 근대사의 지경을 보다 넓고 깊게 바라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만주와 러시아 등 한반도 주변에서의 조선인들의 역사에 대하여 더 큰 관심이 필요하다. 이 역사는 우리가 알든 모르든 거기 분명히 있고,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모르는 채로 살아간다면 언제까지나 불완전한 채로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