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 김영하 산문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릴 때, 나는 판타지소설을 좋아했다. [반지의 제왕] 같은 외국 작가들의 작품들도 물론 좋아했지만 국내 작가들이 빚은 판타지소설을 더 좋아했다. [드래곤라자]와 [하얀 로냐프 강]은 지금도 가끔 생각나서 찾아 읽을 정도로 좋다. 네모난 교실, 네모난 책상, 네모난 칠판이 전부였던 나의 청소년기에 판타지 소설들은 돌파구였고 피난처였다. 책장만 열면 판타지의 세계로 풍덩 빠져들 수 있었으니까.

판타지소설에서 시작된 소설 사랑은 우리나라 장편소설을 읽는 방향으로 뻗어갔다. 누런 갱지에 인쇄된 [토지]를 한 권, 한 권 넘어가며 나는 수학여행으로도 가본 적 없는 경남의 하동, 일본, 만주를 마음으로 누볐다. 앨리스가 저도 모르게 토끼굴로 빠져든 것처럼 소설 속은 블랙홀 같아서 한 편의 소설을 읽는동안 나는 소설 속 인물들과 함께 그 소설의 세계를 여행하다 책장을 덮는 순간 다시 현실로 돌아오곤 했던 것이다.

 

여행을 갈 때 책을 들고 가는 애서가들이 많은데 나 역시 그 중 하나다. 하지만 소설만은 웬만하면 들고 가지 않는다. 현실의 여행과 소설 속 여행이 겹쳐 시너지를 일으킬 때도 있지만 묘한 괴리감을 받은 경우가 더 많아서다. 여행은 몸으로 가든지, 소설 속으로 가든지 둘 중 하나만 하는 걸로, 경험이 가르쳐줬다.

 

여행의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소설가 김영하야말로 온갖 경험들을 찰진 표현으로 내어놓을 수 있는 유능한 여행가로 꼽을 수 있겠다. 이미 방송 프로그램 <알쓸신잡>에서 증명한 바, 그는 여행을 즐기는 여행광이다. 김영하 작가가 최근에 펴낸 에세이 [여행의 이유]에서 김 작가는 자신이 왜 그토록 자주 여행을 떠나는지를 고백한다. 그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이 시대 많은 사람들, 독자를 포함한 거의 모든 이가 여행에 매료된 이유와 같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인생이 여행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어디에선가 오고, 여러 가지 일을 겪고, 결국은 떠난다. 우리는 극단적으로 취약한 상태로 지구라는 별에 도착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이라는 여행은 먼저 도착한 이들의 어마어마한 환대에 의해서만 겨우 시작될 수 있다. 신생아는 자기가 도착한 나라의 말을 모른다. 부모와 친척들이 참을성을 가지고 몇 년을 도와야 비로소 기초적인 언어를 익힐 수 있다. 부모는 아이가 세상으로 나아갈 준비가 될 때까지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준다. 충분히 성장하면 인간은 지구에 새로 도착한 여행자들을 환대함으로써 자신이 받은 것을 갚는다. 그리고 그들이 떠나갈 때, 남아 있는 이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그들을 환송한다.
책 [여행의 이유] 138쪽

 

 

소설은 우리를 다른 세계로 끌어들인다. 자기도 모르게 집중하게 된다. 소설에서는 그냥 일어나는 사건이 거의 없다. 나중에 일어날 일들과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다. 소설은 재미있는 일들을 집어넣는 게 아니라 무의미한 사건들을 배제하면서 쓰인다. 독자들은 일종의 실험실적 환경에서 인물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그것을 인물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것이 인물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지켜볼 수 있다. 인간과 세계가 좀더 높은 해상도로 다가온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우리를 집중시킨다. 우리는 한 도시의 핵심으로 돌진한다. 변두리의 단조로운 주택가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 현지인들이 겪는 자잘하고 어지러운 일상을 잠깐 맛볼 수는 있지만 오래 지속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여행자는 도시의 정수만을 원한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살핀다. (중략)
여행은 분명한 시작과 끝이 있다는 점에서도 소설과 닮았다.
책 [여행의 이유] 204쪽

 

 

 인생을 여행에 비유한 표현은 낯설지 않다. 독서를 여행에 비유한 표현 역시 낯설지 않다. 김영하 작가는 이 익숙한 비유들을 자신만의 언어로, 자신만의 화법으로 이야기한다. 서로 닮아있는 여행과 인생과 독서의 상관관계가 이 책 [여행의 이유]에서 명료하게 드러난다.

 

 [여행의 이유]에서 저자는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던 여행, 자신의 맨 처음 해외여행, 소설가로서의 여행 등 그동안 그가 했던 다양한 여행의 기억을 들려준다. 그러나 이 책이 여행기는 아니다. [여행의 이유]는 저자의 유년기롭터 지금에 이르는 인생의 흐름 속에 '여행'이 저자에게 어떤 감정과 경험을 선사했는지 그 내밀한 정서를 고백한다. 과거와 미래는 사라지고 오직 현재가 육박해 오는 여정, 낯선 이들 속에서 얻는 뜻밖의 배려와 친절, 아무것도 아닌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겸허해지는 시간. 여행은 익숙한 일상에서 얻을 수 없는 소중한 감정과 생각들을 선사했고 길 위에서 보낸 시간 속에서 건진 진주 같은 이야기들을 저자는 이 책[여행의 이유]에 담았다. 이야기를 통해 인간은 예측 불가능하고 무질서한 현실 속에서 자신을 지켜낼 심리적 틀을 배운다고 저자가 썼듯, 독자는 김영하 작가의 여행 이야기를 읽으며 혼란과 두려움 속 현재의 일상을 견딜 이유를 얻는다.

 

코로나19로 사회적거리두기가 계속되는 지금, 우리의 일상은 예측할 수 없는 위험 속에 있다. 여행을 떠나지 못해서 혹은 예약한 모든 여행 계획을 취소해서 우울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떠날 수 있는 여행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다. 이 무거운 공기 속의 일상을 이겨낼 용기, 온갖 변수 가운데 진정으로 옳은 선택을 내릴 수 있는 혜안을 얻기 위하여 꼭 몸으로 떠나야하는 건 아니다. [여행의 이유]와 같은 에세이든, 주인공이 고군분투 하는 소설이든 아직 우리가 갈 수 있는 여행지는 무척이나 많이 남아있다. 우리에겐 아직 독서가 있다.

독자들은 일종의 실험실적 환경에서 인물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그것을 인물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것이 인물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지켜볼 수 있다. 인간과 세계가 좀더 높은 해상도로 다가온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우리를 집중시킨다. - P20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