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기쁨과 슬픔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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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풀어. 어깨에 힘 풀고 표정도 풀어. 세상을, 우리가 사는 현실을 이야기하자는 데 굳이 무게 잡을 필요는 없으니까. 꼭 맥주컵에 소주 부어서 안주도 없이 마셔야만 '이 빌어먹을 놈의 세상'에 대해 이야기할 분위기가 잡히는 건 아니다. 세상이 빌어먹게도 엿같은 건 사실이고 그런 세상 속에 별 거지같은 인간들이 많다는 것 역시도 사실이다. 사실을 이야기하는 데 필요한 건 분위기가 아니라 날렵한 감각이다.

 

배드민턴을 제법 쳐본 사람을 안다. 스매싱을 제대로 날리려면 어깨에 힘을 풀어야 한다. 어깨와 온 팔에 모든 힘을 다 빼고 난 후에야 비로소 완벽한 스맵으로 완성한 스매싱이 발현된다.

 

[일의 기쁨과 슬픔]은 말하자면 완벽한 스매싱같은 책이다. 굳은 표정으로 각잡고 세상을 옴팡지게 후두려패겠다는 근육은 없다. 소금쟁이가 물 위를 미끄러져가듯 가볍게 날렵하게 그러나 정확하고 민첩하게 기쁨과 슬픔의 감정을 낱낱이 그려낸다.

 

 

십년 뒤에 우리 더욱 성장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요. 나는 혼자 십년 뒤, 라고 조용히 읊조렸다.
너무나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십년 뒤, 그때까지 언니가 회사에 있을 수 있을까.
그때까지 나는 회사에 있을 수 있을까.
32쪽 [잘 살겠습니다]

 

그 순간 케빈과 내 스마트폰 알림이 거의 동시에 울렸다.
우리는 주머니에서 각자의 스마트폰을 꺼내서 들여다봤다. 케빈과 내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웃었다.
60쪽 [일의 기쁨과 슬픔]

 

“전 막 열심히 하기도 싫고, 막 성공하고 싶지도 않은데요.”
돈사장이 장우로부터 시선을 거두면서 크게 웃었다.
“성격이 더러워서 음악은 잘 만들겠네. 아까워 죽겠어.”
그리고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유미의 반응을 생각하니 벌써 머리가 아팠다.
114쪽 [다소 낮음]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의 속눈썹이 자신의 눈에 닿은 것처럼 느꼈다.
문밖의 남자가 내쉬고 있을 콧바람이 여자의 인중에 뜨듯하게 끼쳐 오는 것만 같았다.
너무 빨라서 박자조차 잊은 듯한 심장박동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그 소리가 문밖의 남자에게 전해질까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여자가 잡고 있는 동그란 문고리는 땀으로 흥건했고, 더 잡고 있다가는 녹아 없어질 것 같았다. 남자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보더니 몇 번을 더 깜빡인 뒤 렌즈로부터 얼굴을 뗐다.
177쪽 [새벽의 방문자들]

 

 

그렇다. 같은 시대를 숨쉬고 있는 20-30대의 우리들은 대부분 그렇다. '막 열심히 하기도, 막 성공하고 싶지도' 않다. 뭐 크게 어떤 걸 해보겠다는 마음도 없고 막 엄청난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도 없다. 월급이 입금되었다는 문자에 기뻐하고 첫출근길에 겨드랑이가 젖어서 해고될까봐 초조해하고 새벽 3시에 혼자 사는 집을 두드리는 낯선 사람때문에 공포에 떠는 우리들. 일상의 소소한 에피소드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기쁨과 슬픔의 부피 역시 소소하다. 피를 토할만한 울분이나 세상이 무너진듯한 절망같이 거대한 감정은 우리의 현실 속에 없다. 그래서 [일의 기쁨과 슬픔]이 반갑다. 힘을 다 빼고 가벼운 스냅으로만 날리는 스매싱처럼 [일의 기쁨과 슬픔]이 날리는 공은 재빠르게 현실의 우리들을 공략한다.

가벼운 것은 경박하고 얄팍한 법이라고, 누가 아직도 그런 말을 해? 가볍기 때문에 [일의 기쁨과 슬픔]은 끝도 없이 현실적이고 현실감 가득한 이야기들로 말미암아 이 책에 실린 8개의 단편은 독자의 뇌리에 오래 남는다. 이 단편들은 언젠가 내가 느꼈던 기쁨, 저번에 내가 느꼈던 슬픔들인 탓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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