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대 감기 소설, 향
윤이형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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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이렇게 서로 싸우게 된걸까? 그런 고민에서 출발한 소설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이렇게 치열하게 싸우지 않던 시절도 있었을까? 심진경 평론가의 말대로 과연 우리 시대에 자매애란 가능한 것일까?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이 한창 유행했는데 (지금도 어느 커뮤니티에서는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나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적은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 만인은 만인의 적이다. 만인은 만인에 대하여 투쟁한다. 굳이 토마스 홉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시민론]까지 파고 들어가지 않아도 이 사실은 명백하다. 20세기에 태어나 21세기를 살고 있는 지구촌 인류 중에 이 말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투쟁'에 프레임을 들이대면 곤란하다. 여자는 여자에 대하여 싸운다든지 남자는 남자에 대하여 싸운다든지 뭐 이런 프레임 말이다. 사람의 뇌는 변수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변수는 위기와 위험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때문에 변수를 줄이기 위하여 뇌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그 중 하나가 프레임이다. 시야를 자꾸 좁히는 것이다. 타조가 구덩이에 대가리를 박고 자신이 안전하다고 믿는 행태를 우스워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제발 타조 대가리를 비웃지 마시라. 사람의 뇌도 비슷한 행태를 의식 중에 혹은 무의식 중에 자주 반복한다. 지금도 뉴스 기사나 그 기사의 댓글란에 보면 프레임을 자처해서 뒤집어쓰고 자기가 보고 싶은 세상만 보는 타조들이 얼마나 많은지.

[붕대 감기]는 가능한 모든 프레임을 거두고 21세기 한국 사회에서의 여성들의 삶을 재단하지 않은 소설이다. [붕대 감기]는 제목과는 달리 친절하고 부드러운 소설은 아니다. 독자에게 친절하게 붕대를 감아주기 보다는 붕대를 툭 던져주고 어떻게든 저떻게든 감아보는 게 어떻겠냐며 제안하는 이야기에 가깝다. 이 작품을 읽기 전에 먼저 책 뒤에 실린 심진경 평론가의 글을 읽고 작품을 읽는 게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이 작품이 무엇을 묻는지, 무엇을 생각해보자고 제안하는지를 좀더 선명하게 느낀 후에 작품을 읽으면 훨씬 얻는 게 많을 테니까.

전업주부와 워킹맘, 기혼녀와 비혼녀는 서로를 이해하기보다 적대시한다. 서로 불화하는 이 여성들에게 과연 자매애란 가능한 것인가. 서로 입장과 처지가 다른 다양한 여성들이 펼쳐가는 각색의 에피소드와 대화를 통해 이 소설이 암시하는 고민의 핵심은 거기에 있다.

175-176쪽 심진경 평론가의 글 중에서

이 책은 여성들의 연대에 대하여 감히 이야기하는 동시에 왜 이렇게 우리-여성, 남성, 장년과 청년, 부모님와 자녀 등등-는 서로 싸우는 것인지 그 이유에 대한 힌트까지 담고 있다. 페미니스트 운동가인 형은과 채이의 대화가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이런 내용이 나온다.

하지만 언니, 자원이 부족한 거야. 우리가 사는 세상이 너무 거지 같은 걸 어떻게 해? 지금은 모두가 풍족해질 만큼 힘을 나눠 가질 수가 없어. 덜 가진 쪽은 더 가진 쪽을 보면 화가 나기 마련이야. 얼굴을 보자마자 화가 나는데 만나고 싶겠어?

146쪽

나는 지금 우리 세상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가 '계급'과 '차별'의 경계가 허물어졌다는 데에 있다고 본다. 어느 사회나 계급이 있다. 사람이 사는 곳이든 동물의 세계든 식물의 세계에서조차 계급이 있다. 조직이 존재하는 한 계급은 없어질 수 없다. 조직이 존재한다는 건 그 조직을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이 적합한 역할에 따른 계급으로 나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계급과 차별이 동의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계급은 구분되는 것이지 차별의 정당화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이 구별이 안 되는 게 지금 우리의 세상이다. (이 구별이 되었던 적은 지금까지의 역사 중에 한 번도 없었다) 차별을 없애려면 계급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고 계급을 빌미로 차별을 당연시하는 것 모두가 틀렸다고 본다. 그런데 이 구별이 어려워서일까? 현실에 적용하기 까다로워서일까? 계급은 권력과 자본 즉 가진 자들의 소유로 인식되는 게 현실이다. 형은과 채이의 대화는 이 비틀린 현실을 꼬집는다.

그럼, 그래서 뭐 어쩌라고? 보기만 해도 화가나니까 계속 싸우자고? 그런 방향 말고 다른 방향을 제시하려고 [붕대 감기]는 이야기한다. "시간이 지나야 해. 서로를 배우려고 노력해야 하고 그 일에는 시간이 걸려." 진짜 좋은 말이라고, 이 소설에서 [붕대 감기] 중에서 가장 뜨거운 한 문장을 고르라면 나는 이 문장을 고를 것이다.

단순한 여성주의 소설이라고 보기에는 참 다양하고 다각도의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책 [붕대 감기]

서로에게 붕대를 감아주기를 원하는 모든 동지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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