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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보는 그림 - 시끄러운 고독 속에서 가만히 나를 붙잡아 준 것들
김한들 지음 / 원더박스 / 2019년 12월
평점 :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작품에 집중하는 시종여일한 생활을 한다. 성실함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손에 익은 움직임만이 이끌어 낼 수 있는 자연스러움에 나는 곧, 잘 반한다. 톨스토이도 진실하며 필요 불가결한 것들은 언제나 오랜 시일에 걸친 꾸준한 노력으로 얻어진다고 했다. 결국 모든 것은 시간이 만들어 내기에 ‘소중한’ 이라는 형용사는 그 앞에서 떼어 낼 수가 없다.
책 153쪽
삶은 꾸준한 것이라고 여긴다. 작은 물방울 몇 개가 산 바위틈에서 시작하여 바다로, 바다로 다다르기 위하여 계속 움직이듯이. 다다르려는 길에 커다란 장애물을 만나더라도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잠시 머무르긴 해도,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산책하듯이 삶은 꾸준히 간다. 저자가 인용한 톨스토이의 말대로 진실한 것들의 재료가 꾸준함이라면 우리 삶보다 더 진실한 것은 없을 것이다.
이 꾸준함의 속성은 ‘연결’이다. 꾸준함 속에서 어제와 오늘이 연결되고,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가 연결된다. 점과 점이 연결되어 선이 되고, 선들이 맞닿아 면이 되어 하나의 차원을 이루고 세계가 직조된다. 이렇게 탄생하는 세계, 이렇게 만들어진 나라는 생生.
그림 보는 일은 마치 나라는 세계가 만들어지는 일이라는 걸 이 책을 읽고 알았다.
큐레이터로 일하는 김한들 저자는 ‘미술’과 함께 평생을 살아왔다. 40년이 채 안 되는 그의 생은 그를 지탱해 주는 것들과 연결되는 꾸준한 노력들로 직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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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보는 그림이지만 홀로 있지 않다. 그림과 함께 있고, 그림을 그린 작가와 함께 있다. 그곳에서 저자는 점과 점 사이의 선을 연결하듯 그림과 자신 사이를 의미로 연결한다. 저자는 그림에게만 연결되지 않는다. 세상을 촘촘히 채우고 있는 문학, 음악, 풍경에게도 조곤조곤 의미를 걸어 자신과 연결한다. 이 의미는 온기가 되어 저자의 삶을 견고하게 직조한다. 그런 저자의 이야기를 읽은 독자는 저자와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이건 누구에게나 자신의 몫이다.’ 나를 발견하고 대상을 탐구하고 결국 그 사이에 의미로 선을 놓아야 하는 주체는 나다. 이렇게 연결되지 않는다면 삶은 누구의 것이라도 정처 없이 부유하기 쉽다.
이 책은 그림 보는 사람의 이야기다. 그림을 보는 방법을 지도하거나 어떻게 예술을 읽어야 하는지를 교육하는 책은 아니나, 그림 보는 사람의 시선을 따라 그림이 달리 보이는 만화경 같은 수필이다. 저자는 학창시절의 공부, 진로, 직장 생활, 연애, 휴식까지의 생애를 담백하게 들려준다. 전병구, 박광수, 팀 아이텔, 알렉스 카츠의 그림과 함께 저자의 독백이 이어지는데, 그림에 담긴 이야기와 그림을 보는 시선 그리고 그림과 연결되는 생의 면면이 절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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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온도는 36.5도. 이 따듯한 기운이 꾸준하지 않으면 탈이 난다. 저자는 그림과 나, 사람과 나 사이에서 온기를 충전하는 플라뇌르다. 플라뇌르는 19세기에 등장한 프랑스 단어로 ‘한가롭게 거니는 사람’을 가리킨다(책 177쪽). 저자는 사람과 사물에 대한 호기심을 따라 꾸준히 거닐면서 온기를 채운다. 이 책에서 ‘온다, 다다른다, 머무른다’ 등의 표현들이 눈에 자주 띄는 것은 아마 플라뇌르인 저자의 표정이 살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림과 사는 일에 대한 저자의 안목이 돋보이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