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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어하우스
베스 올리리 지음, 문은실 옮김 / 살림 / 2019년 1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어울리는 연애소설 [셰어하우스]
‘소유’에 질린 우리들은 이제 '공유'에 눈을 떴다. 에어비앤비, 쏘카 등을 이용해 숙박 공간과 차량을 공유하는 건 물론 옷, 책이나 사무 공간, 취업 정보까지도 함께 쓰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1인가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미니멀리즘까지 유행하면서 무엇이든 ‘공유’하여 쓰는 게 우리 시대의 문화로 자리 잡았고 공유경제라는 단어로 총칭되는 이 세계적인 패러다임 속에는 당연히 셰어하우스도 포함된다.
그런데 이 셰어하우스의 경우 공유의 적정선이 조금 미묘해진다. 공간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관심을 차단한 채로 각자의 영역을 꾸려가는 정도의 셰어하우스라면 그들의 관계는 그냥 기숙사를 함께 쓰는 지인 정도가 될 것이다. 한데 단순히 같은 공간을 사용하는 정도가 아니라, 음식을 공유하고 음식을 먹는 기분을 공유하고 음식을 먹은 후에 예정된 나의 계획까지 공유하는 사이라면 이들의 관계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셰어하우스]의 주인공 티피는 남자친구의 호화로운 아파트에서 살다가 그와 헤어지면서 급하게 거주지를 구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런던의 집값은 그야말로 살인적이라서(서울의 집값도 못지않다는 점에서 티피의 절박함에 자연스럽게 이입이 된다) 티피는 어떻게든 집값을 줄여보고자 낯선 남자의 셰어하우스로 들어가게 된다. 이 남자, 리언은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간 동생의 변호 비용을 대기 위하여 야근 업무에 추가 업무까지 떠맡아가며 돈을 모으고 있었다. 온 집의 모든 공간을 함께 사용하는 조건으로 그가 얻게 될 월세는 그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셰어하우스 메이트가 여자라고 했을 때, 애인인 케이가 눈에 쌍심지를 켰음에도 불구하고 티피를 하우스메이트로 들이는 걸 포기할 수 없을 만큼.
자신을 학대한 남자친구로부터, 그가 채워놓은 족쇄 같은 기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트라우마 투성이인채로 하루하루를 간신히 살아가는 티피와 동생의 구명, 환자 돌보기, 까칠한 여자친구 비위 맞추기에 24시간이 모자란 리언의 동거에는 철칙이 하나 있었다. 둘은 서로를 만나지 않는다는 것. 케이는 리언이 티피와 직접 이야기하지 않도록 자신이 리언의 대언자가 되어 티피에게 셰어하우스와 관련한 내용들을 전달했다. 티피 역시 리언의 여자친구인 케이에게 연락을 받는 걸 당연히 여겼다. 이 기묘한 동거에 신묘한 감정이 흐르게 만든 것은 얇디얇은 포스트잇이었다.
베이킹을 잔뜩 해 놓고 포스트잇에 자기가 왜 이렇게 많은 먹거리를 구웠는지 적은 티피. 티피의 메모를 읽으며 티피가 구운 빵을 먹고 그녀에게 답문을 써서 그 옆에 붙여 놓은 리언. 욕실 사용의 디테일에 대해서, 윗집과 아랫집 이웃들에 대해서, 쓰레기를 내놓는 날에 대해서, 침대 밑에서 발견한 손뜨개 목도리들에 대해서, 어느 날 리언의 동생 리치로부터 걸려온 전화에 대해서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날 때의 기분과 감정에 대해서 둘은 포스트잇 메모를 주고받았다. 같은 공간에서 다른 순간에 머물렀음에도 불구하고 포스트잇들을 타고 주고받은 감정은 인연의 끈이 되어 그들 사이를 엮었다. 마치 티피가 열광한 프라이어 씨의 손뜨개 목도리처럼, 촘촘하고 알록달록하게 엮인 티피와 리언은 결국 연인이 되고야 만다. 공유가 이렇게나 대단한 것이다. 기분과 감정의 공유는 서로가 상대의 얼굴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둘을 연인이 되게 하니까.
프라이어 씨 – 선생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걸 좋아하는지 몰랐어. 워낙 홀로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말이야. 그게 케이하고 같이 살지 않는 이유 아닌가?
내 사생활 얘기를 환자들과 나누는 짓을 이제 그만두어야겠다.
나 - 이건 다른 거예요. 저는 티피를 만나지 않아도 돼요. 우린 그냥 메모를 주고받는 것뿐이라고요. 정말이에요.
프라이어 씨가 생각에 잠겨 고개를 끄덕인다.
프라이어 씨 – 편지의 예술이란 게 있지. 몹시도... 친밀한 행위야. (중략)
이튿날 밤이 되자 홀리까지 티피에 대해 알고 있었다. 환자의 상당수가 병상을 못 벗어나는 병동들 사이로 별 흥미로운 것도 없는 소식이 빨리도 퍼진다. 신기할 따름이다.
홀리 – 예뻐요?
나 - 나도 몰라, 홀리. 그게 중요해?
홀리가 말을 멈췄다.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홀리 – 착해요?
나, 잠깐 생각하고 나서 – 그래, 착해. 좀 야단스럽고 특이하지만, 착해.
책 106-107쪽
영국작가인 베스 올리리의 소설 [셰어하우스]는 우리 시대에 어울리는 연애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아니, 어울린다기보다는 필요한 연애이라고 해야 더 맞지 않을까. 그동안 우리의 연애는 소유와 수집, 집착에 매몰되곤 했다. 내 남자, 내 여자 혹은 우리 자기. 연인들 간에 ‘너는 내 소유’라는 암묵적인 합의가 당연했고 이 합의에는 너의 시간, 너의 거취, 너의 선택도 모두 내 소유가 된다는 계산이 깔리기도 했다. [셰어하우스]는 이러한 연애와 사랑의 개념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저자는 티피와 리언을 통하여 연애도 사랑도 더 이상 소유가 아니라 SHARE 공유라고 이야기한다. 네가 나에게, 내가 너에게 소속되어 내가 너의 시간과 감정, 너라는 존재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감정, 경험, 문제, 위기, 갈등을 공유해서 함께 만들고 해결해 가는 점을 말이다.
소유로서의 사랑과 공유로서의 사랑은 티피와 리언 각자의 전(前) 연인들 사이에서 극명하게 대비된다. 티피의 전 남자친구 저스틴은 티피를 소유물로 생각하는 전형적인 쌍놈이다(욕을 적어서 대단히 죄송하지만, 이런 쌍놈이 서울에도 많다는 사실에서 또 한 번 자연스럽게 티피에게 이입되지 않을 수 없다.) 저스틴은 ‘가스라이팅’으로 여성을 학대하고 길들이며 그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많은 남성들을 대표한다. ‘너 같은 걸 만나주는 남자는 나밖에 없다, 너에게 이렇게 대단한 선물을 나니까 해주는 것이다, 너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고 오직 내 결정만이 옳다.’로 일관하는 저스틴은 여성으로서뿐 아니라 한 인간 개체로서의 티피를 완전히 뭉개놓은 장본인이다. 자신의 행태가 사랑이라고 굳게 믿는 저스틴과 그에게 휘둘리는 티피의 관계는 서로에게 파괴적이다. 티피만 아니라 저스틴도 이 관계에서 피해를 입는 것이다. 이 굴레를 깨고 이 관계가 병(病)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티피나 저스틴은 평생 온전한 개체로서, 한 인간으로서 바로 설 수 없다. 다행스럽게도 티피는 주변에 똑똑한 친구들과 공감능력이 높은 리언을 만나 소유가 아닌 공유로서의 건강한 연애에 눈을 뜬다.
한편 리언의 전 여자친구인 케이는 저스틴과는 다른 의미에서 파괴적이다. 공감능력이 낮은 케이는 리언과는 상극이었다. (사실 이 둘이 어떻게 연인이 되었는지 책을 다 덮고 나서도 의아하다.) 리언의 상황과 그의 절망, 가족애와 인류애, 애틋하고 따듯하게 주변을 돌보는 마음을 케이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케이는 그저 리언에게 관심과 시간과 애정을 달라고 요구하는, 소유로서의 연애가 전형적인 사람이다. 그런 그녀가 공감과 연대를 중요하게 여기는 리언의 가슴을 찢어놓는 말을 한 것은 어쩌면 그녀로서는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안타까운 것은 지금도 우리 시대에 수많은 연인들이 서로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주려는 마음보다 상대로부터 관심과 감정을 수집하기에만 급급한 현실이다.
케이 - 요즘 당신은 2주마다 면회를 다니지.
진심으로. 감옥에 갇힌 동생을 만나러 가서 화가 났다는 건가?
케이 - 그것 때문에 화내면 안 된다는 거 나도 알아. 잘 알아. 하지만 그냥.... 당신은 시간이 너무 없고, 이제 그 없는 시간 중에 더 작아진 짜투리만 내 몫이라는 기분이 든다고.
책 165쪽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30대로 접어들고 나서는 ‘연애소설’이 좋아졌다. 사람들이 왜 로맨스코미디 영화나 드라마를 즐겨보는지 알게 되었다. 나 역시 이 장르의 열렬한 팬으로 동참하게 된 건 두말 할 것 없고.
연애소설을 읽게 되는 건 유사연애를 하는 기분이 들어서가 아니다. 연애가 얼마나 사람을 성장하게 만드는지, 성숙하고 빛나고 아름답게 만드는지를 다시금 확인해주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셰어하우스]는 이 책의 홍보문구 그대로 ‘우리 시대에 어울리는 로맨스’다. 모든 것이 공유 문화에 접어들고 있는 우리 시대에 이제는 사랑도 공유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TMI의 인간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티피의 매력 그리고 연인의 조건으로 ‘남다른 공감 능력’을 1순위에 올리게 만든 리언의 따듯함에 폭 빠져 그들의 로맨스를 부러워하게 만드는 소설, [셰어하우스]다.
홀리 – 예뻐요? 나 - 나도 몰라, 홀리. 그게 중요해? 홀리가 말을 멈췄다.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홀리 – 착해요? 나, 잠깐 생각하고 나서 – 그래, 착해. 좀 야단스럽고 특이하지만, 착해. 책 106-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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