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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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밀 할아버지는 인정이란, 인생이라는 커다란 책 속의 쉼표에 불과하다고 말하는데, 나는 노인네가 하는 그런 바보 같은 소리에 뭐라 덧붙일 말이 없다. 로자 아줌마가 유태인의 눈을 한 채 나를 바라볼 때면 인정은 쉼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쉼표가 아니라, 차라리 인생 전체를 담은 커다란 책 같았고, 나는 그 책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로자 아줌마를 위해 기도하려고 회교 사원에 두 번 간 적이 있었는데, 회교 사원의 힘이 유태인들에게는 별 효험이 없는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118쪽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여자는 몸을 팔아 입에 풀칠을 했다. 노년이 되어 더 이상 그녀의 몸을 사는 사람들이 없게 되자 창녀들이 낳은 아이들을 키워주는 탁아소 비슷한 걸 하면서 연명하게 되었다. 그녀가 맡아 기른 아이들의 피부색은 다양했다. 다문화 다국적 기조의 트렌드세터였던 것이다, 로자 아줌마는. 유태인이었던 그녀는 종교와 피부색, 심지어 부모가 누구인지도 상관없이 맡은 아이들을 돌봤다. 모모는 늙고 못생긴 그녀의 뺨에 키스하기에 인색하지 않았다. 그녀를 위하여 쓰레기통에서 꽃도 줍고, 그녀를 위하여 기도도 한다. 조숙하고 똑똑하고 유별나게 예민한 모모는 로자 아줌마를 통하여 비로소 ‘자기 앞의 생’이라는 숙명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다.

 

 자기 앞의 생을 깨닫는 일과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은 아주 다르다. 그 ‘생’이라는 말종과 죽을 힘을 다해서 다투는 사람도 있고, 그 ‘생’의 엉덩이에 깔려서 평생 비명만 지르다 죽어버리는 사람도 있다. 생은 어느 누군가에게는 비열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인색하고 아주 특별한 몇몇에게는 자비롭다. 아무 힘없는 인간의 입장에서 그런 ‘생’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이 어려운 일을, 모모가 해낸다. 이 책의 끝에서. 아주 참담한 슬픔과 고통을 통하여, 모모는 결국 인정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서 살아갈 힘을 얻는 게 아니라,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하여, 이 뭣 같은 생을 밥처럼 씹어 삼키기 위하여 사랑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사랑해야 한다.
311쪽

 

 

 다 읽고 나서 이토록 미묘한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소설이 또 있었나? 나는 생각해본다.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비극적이기도 하고 희망적이기도 한 이상한 기분 속에서 이 작품을 돌이켜본다. 대체 이건 무슨 이야기였을까, 무슨 소리였을까? 내가 읽은 건, 어쩌면 내가 들은 건? 아, 이건... ‘생’이 걸어온 말이었다. 내 앞의 생이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였다.

 

 

 그녀는 무척 차분해 보였다. 다만 오줌을 쌌으니 닦아달라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던 것 같다. 아름답다는 것은 우리가 누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279쪽

 

 

생이 마치, 자기가 이렇다고 말하는 듯하다. 생이 아름답다는 것은 우리가 생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그러니 이 구차하고 구질구질하고 정말 도저히 못 봐줄만큼 못생긴 것이 내 앞의 생이 가진 얼굴이라고 해도 사랑해 달라고, 살기 위하여 사랑하라고 한다.

 이 소설만큼 슬픈 소설은 흔하지 않다. 중반부를 지나고 나서부터는, 소설 한 장을 읽을 때마다 휴지 한 장을 써야 했다. 결코 울고 싶지 않은 날에도 나는 어쩔 수 없이 울고 말았다. 그러나 이 소설만큼 삶에 의욕을 주는 소설 역시 흔하지 않다. 참 아이러니 하다. 삶 자체가 본래 아이러니한 것이다. 어차피 길의 끝에 기다리는 것이 죽음뿐인 허무한 것이 우리의 생인데, 정작 그 생의 굴절마다 우리가 배우는 것은 허무의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랑이나 희망 같은 것들이다. 누군가 이 책에 대해 나에게 물어본다면, 나는 이렇게 말해야겠다. 생의 아이러니를 가장 행복한 빛깔로 그려낸 작품이라고.

그녀는 무척 차분해 보였다. 다만 오줌을 쌌으니 닦아달라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던 것 같다. 아름답다는 것은 우리가 누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2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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