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플라이트 오늘의 젊은 작가 20
박민정 지음 / 민음사 / 201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숙에게 묻고 싶었다. 당신도 화가 났어? 나만 별생각 없었던 거야? 그러나 그 질문은 곧 ‘당신도 B항공사가 유나를 죽였다고 생각해? 나만 별생각 없는 거야?’와 같은 말로 들릴 것이었다.
 18쪽 유나의 장례식장에서 정근의 독백

 
  하루에도 몇 번이고 비행기를 볼 수 있다. 내가 사는 동네의 하늘이 김포공항으로 오고 가는 하늘길목에 있어서인지 비교적 낮게 날아가는 비행기를 쉽게 보곤 한다. 비행기에 탄 채로 지상을 내려다보면 마치 속세를 떠난 신선이 된 것처럼 인생사가 무상하게 느껴진다고, 보통은 그렇게들 이야기한다. 하지만 비행기에서 지상을 바라보는 시간보다, 지상에서 비행기를 바라보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은 나로서는 오히려 비행기 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인생무상으로 느껴진다. 저 커다란 비행기 안에 탄 수백 명의 사람들이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그 순간을 살고 있고, 그 안에서도 기장이니 승무원이니 하는 사람들이 긴장을 놓치 못한 채 분주히 일하고 있을 텐데. 그것을 멀찍이에서 바라다보는 입장에서는 마치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전에서 동물들의 한 때를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듯 그 비행기의 풍경이 큰 의미도 없고, 나와는 무관한 일로 느껴진다.

 

 그 비행기 안에서 일하던 그녀가 자살했다. 차를 몰고 저수지로 돌진했다는 그녀에게 물어볼 순 없었다. 왜 그랬냐고? 그녀의 속사정은 그녀가 죽은 후, 살아남은 사람들로 말미암아 비로소 복기된다. 그녀가 생존해 있었다면 아무도 그녀의 사정을 궁금해 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녀의 아버지조차도.


 딸의 장례식장에서 아버지 정근은 누가 그녀를 죽였는가를 두고 갈등한다. 그녀의 죽음의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였다. 딸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딸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귀기울이지 않았던 정근은 누가 딸을 죽였는가를 추적하면서 비로소 딸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의문은 ‘누가 죽였는가?’에서 ‘왜 죽었는가?’로 옮겨간다.

 


 나는 귀찮아했을 거예요. 심지어 나 자신의 일도 귀찮았거든요.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이유로 따귀를 맞았을 때 나는 집에 가고 싶다고만 생각했습니다. 반신욕하고 누워 자고 싶다. 온통 그런 생각뿐이었습니다.
32쪽  유나의 일기 중에서

 

 팀원 중 한 명, 엑스맨으로 배치하여 평소 생활을 상부에 보고하도록 만든 ‘엑스맨 제도’요. 우리 팀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혹시 그게 나인가? 싶었어요. (중략) 우리 중 누가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고 섣불리 짐작하려 들지도 않았죠.
 아빠,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상처를 주는 것 같아요. 멀리 있는 사람들은 상처를 줄 수조차 없죠.
 123쪽   유나의 일기 중에서

 


 유나의 사정은 아주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직 중학생이었던 그때로, 유나가 어른들의 비양심과 몰염치에 진저리를 내기 시작한 그때로 올라가야 한다. 그녀의 부모조차 이해하지 못했던 유나의 기분과 선택은 유나의 지금을 만들었다. 정근은 딸이 그에게 했던 말들을 되새기려, 그 아이의 눈빛이 어땠는지를 떠올리려 애써본다. 이미 딸은 죽었고 지나간 모든 날들을 돌이킬 수는 없으나, 죽은 그 아이가 정근의 딸이기 때문에. 결국 그 아이가 스스로를 죽이도록 선택한 것은 어쩔 수 없이 정근의 기분과 선택이 만들어 준 것인지도 모르기에.

 

 소설이라는, 글자와 허구에 불과한 이 얄팍한 페이지들이 현실의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 이 작품은 보여주려 한다. 소설이 현실의 무게와 심연을 어디까지 짊어질 수 있는지 시도한다. 나의 읽기가 아직 둔탁한 까닭인지, 유나의 사정이 (그 양심의 무게와 가책, 괴로움의 부피가 작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선명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망자가 살아있을 적에 감내해야 했던 모욕에는 깊이 감화가 되나, 그녀의 죽음은 여전히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오히려 비겁한 침묵과 권위주의로 일관했던 정근의 이야기가 보다 잘 드러났다면 어땠을까 싶다.

아빠,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상처를 주는 것 같아요. 멀리 있는 사람들은 상처를 줄 수조차 없죠.
123쪽 유나의 일기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