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교토의 오래된 가게 이야기 - 세월을 이기고 수백 년간 사랑받는 노포의 비밀
무라야마 도시오 지음, 이자영 옮김 / 21세기북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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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기차역에서 내려 처음 들이쉬었던 그 공기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천년이라는 시간을 과연 어떻게 체감할 수 있을까 의문이었는데, 기차에서 나와 하늘을 보고 숨을 마시고 햇빛을 맞는 그 순간에 몸이 먼저 느꼈다. 오래된 도시, 아득한 천년을 살아 지금도 숨쉬고 있는 길과 집과 들. 국내 여행지 중에 어디가 제일 좋았냐고 물으면 언제나 주저 없이 ‘경주’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나는 경주를 좋아한다. 그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로 여전히 살아있는 도시여서.

 

 아마 내가 일본의 도시 중에서 교토를 좋아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를 관광지로서든 역사적 의미에서든 별로 좋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교토는 어딘가 마음을 끄는 데가 있다. 단순히 오래된 도시라서가 아니다. 그렇게 유구한 시간을 살아왔음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도시로 기능한다는 사실 자체가 어떤 숙연함을 느끼게 한다. 도시를 지키는 수호신이 정말 있는 것은 아닐까, 그 터 자체에 어마어마한 기운이 서려 있는 건 아닐까 싶은 마음에서 나는 경주나 교토처럼 오래도록 살아있는 도시들이 좋다.

 

 

 그런데, [천년 교토의 오래된 가게]를 취재한 이 책의 머리글(추천의 글)에서, 모종린 교수는 경주와 교토가 천년 고도라는 점에서는 비슷하나 경주에는 비교도 되지 않는 교토만의 경쟁력을 과감하게 짚어낸다. ‘과연 경주에 3대 이상 지속된 노포가 몇 개나 있을까?’ 교토에는 100년 이상 된 가게도 많은데다 3대 이상 걸쳐 이어오고 있는 상점들이 다양한 업종에 분포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천년 교토의 오래된 가게]의 저자는 서적, 주조, 식품 등 다양한 분야의 노포(3대 이상 지속) 10곳을 취재하여 각 상점만의 역사와 경쟁력, 그들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하여 책에 담았다.

 

 서점인 마루젠이나 술을 빚는 마쓰이 주조회사 같은 경우에는 충분히 100년을 지속해왔음직한 지원이나 배경, 시대운 등이 있었으리라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처럼 국토 전체가 쑥대밭이 되는 사달이 나지 않는다면 1900년대처럼 역동적이고 다이나믹한 근대화의 세상에서 100년 동안 찻집이나 초밥집 같은 업종을 지속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리라. (내가 여전히 장사를 너무 쉽게 생각해서 이런 소감이 드는 것일 수 있다. 100년을 너무 만만하게 보는 건방진 생각일수도...) 하지만 보리로 만든 사탕을 팔면서 3대가 넘도록 지속해온 가게(미나토야 유레이코소다테아메)라든가, 도장이라는 아이템 하나로 건사해온 다마루인보텐 같은 상점은 정말 대단한 내공과 지구력이라고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다마루인보테의 경우 얼마 전 읽었던 [서울백년가게]에서 본 인장가게 ‘인예랑’의 운명과 겹쳐졌다. ‘쇠락의 길을 걷는 창작의 예술’이라는 소제목이 마음에 콱! 들어박혀서 안타까운 심정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100년을 이어온 내공으로 다음 100년을 이어가기를 바라는 기대와 응원으로 이 책을 쓴 저자처럼 독자인 나도 같은 마음이 되더라.

 

 종이책이 사라질 것이라는 예측이 30년 전부터 등장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어떤 사람들은 더 확신에 찬 어조로 그 예측을 반박한다. 종이책의 아날로그 정서는 시간이 지나고 아무리 첨단 기술이 등장해도 건재할 것이라고.

 어쩌면 이런 저런 예측 속에, 이렇게 저렇게 복잡한 매듭과 고리가 만들어지며 지속되는 것이 천년 고토, 백년 노포가 아닐까 한다. 내일 일도 모르겠는데 무슨 몇 십년 일을 알겠는가? 다만 긴 세월보다 질기고 굳건한 신념을 하루하루 쌓아간다면 언젠가는 역사가 되겠지. 사탕가게를 지키는 그녀처럼 고양이 한 마리 지나가지 않는 날에도 고작 단 한 명의 손님에게 사탕을 팔게 되더라도 사탕이 맛있다는 한마디에 힘을 얻어 가게를 경영해가는 마음이라면, 단 한 번의 숨에 담긴 공기에서 천년의 감동을 느끼게 하는 경주와 같은 역사를 오늘날 우리도 만들어갈 수 있으리라.

1,2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교토의 마을에서 150년밖에 되지 않는 마루젠의 발걸음은 바로 최근의 일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150년은 일본이 근대 국가로 성장하고 몇 번의 전쟁을 겪으면서 평화와 인간 존엄의 중요함을 배워온 귀중한 세월의 집적이기도 했다. 서점이 단순히 ‘책을 파는 가게’가 아니라 문화와 지혜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다는 것에서 미래의 가능성이 보인다.
2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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