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안 죽어 - 오늘 하루도 기꺼이 버텨낸 나와 당신의 소생 기록
김시영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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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온량한 혀는 곧 생명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 성경 잠언서 15장 4절

 

 어제 아침에 모 택배 집하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택배를 주문했는데 주소지를 이상하게 적어왔다는 것이다. 주소지가 이상하므로 배달을 할 수 없으므로 반송하겠다는 통보였다. 똑같은 주소를 적어서 택배를 주문한 다른 업체들에게서는 아무런 문의도, 불평도 들은 적이 없었기에 나는 당황했다. 더구나 주소지가 이상하니 반송하겠다고? 그럼 다른 업체들이 배달했던 그간의 택배들은 다 어떻게 왔단 말인가? 4차원의 문으로? 어이가 없어서 내가 주소를 다시 알아보고 있는 3분여 사이, 이 문제의 택배 건을 주제로 한 통화는 A기사에서 B기사로, B기사에서 C기사로 넘어갔다. A기사와 B기사와의 통화는 그야말로 시정잡배만도 못한 우기기와 막무가내와 고성이 점철된 롤러코스터였다. ‘뭐 이런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배달을 한다고 하고 있지?’ 싶은 마음에 욕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C기사와 마지막으로 통화를 했다. C기사가 제일 고참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으나 노련했다. 차분하게 주소지를 다시 확인하고 어떻게 저떻게 일은 일단락되었다. 


 지나가다 새똥을 맞은 듯 난데없이 불쾌한 일이 있고 나서 잠시 생각했다. 우리 동네 기사님들이 양반이었던 거구나, 세상에 바쁘다는 이유로 멋대로 일하는 택배기사들이 많다더니 이런 경우인가?, 아침에 집하장이 바쁘니 마음이 급하면 우격다짐으로 반송처리하겠다는 어이없는 태도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정말로 이상하기 짝이 없다. 이런 생각에 빠져 있다가 집 앞에 얌전히 놓여 있는 택배 몇 개를 발견하고 집 안으로 들였다. 그러면서 또 다시 생각... 이렇게 잘 오는 택배도 있으니 뭐, 괜찮아.

 

 [괜찮아, 안 죽어]는 어느 시골의사가 쓴 에세이다. 아드레날린이 혈관을 전력질주하는 응급실에서 근무하던 저자는 한적한 시골의 병원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처음에는 지루하고 지루하고 지루하고 지루하여 견딜 수 없어 하던 그가 지금은 1층에서 2층(병원이 2층인데 엘리베이터가 없다)으로 계단을 걸어 올라온 노인들의 푸념을 넉넉하게 받아주기도 하고, 감이니 우유니 떡 따위를 새카만 봉다리에 싸다 주는 마음의 결을 한 자락씩 물고 뜯을 줄도 아는 의사가 되었다.

 

 이 책에 실린 38편의 이야기는 푸근하다. 귀가 어두워서 딴에는 속삭인다고 하면서 복도가 울릴 정도의 큰 소리롤 대화를 나누시는 할머니들의 에피소드도 정겹고, 일부러 감을 잔뜩 따다가 홍시를 해 먹으라고 바리바리 싸오는 어르신의 인심도 안락하다. 그러나 과연 글로 적힌 빛깔 그대로 그의 일상이 넉넉하고 안온하겠는가? 절대 아닐걸? 책의 맨 뒤에서 저자는 토로한다. ‘나는 사실 괜찮지 않다’. 복장 터지게 만들고, 불쾌감을 주고 때로 다시 얼굴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그의 병원을 찾아온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욕지기를 하고 웃는 낯으로 인사를 하면서도 다시는 오지 말라고 속으로만 이야기도 해본다. 그리곤 온량하고 선량한 대화와 사소한 일들이 파이 크러스트처럼 향긋하고 따듯하게 겹쳐 있는 일상의 다른 면을 떠올리곤 그 기운으로 버티며 살아간다고 고백한다.

 

 

 아무튼 폭발할 것 같은 순간이나 반대로 힘이 쪽 빠지는 고단한 감정을 애써 외면하며, 그 감정의 파도가 뇌세포 안으로 스며들지 않도록 버텨 나가는 일은 결코 녹록지 않다. 입으로는 늘 괜찮다고, 사람은 그리 쉽게 안 죽는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나 역시 괜찮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럼에도 나는 처음에 이야기한 그 자연스럽고 간단한, 그저 필요한 것을 서로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소통과 교감이 비교적 무난하게 이뤄지는 선량한 나의 사람들로부터 받은 위안과 감사로 버티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과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를 통해 말이다.
 온갖 잡다한 감정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 세상에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며, 그 감사함만으로도 살아갈 이유 역시 충분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258-259쪽  사실 나는 괜찮지 않다 중에서 

 

 

사는 일은 다 이런 일인가보다. 괜찮아, 안 죽어.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죽어. 죽을 정도는 아니니까 넘겨버리자는 말 속에 이미 언젠가는 다 죽는다는 결말을 담고 있는 저 말은 너무나 아이러니하다.

아무튼 폭발할 것 같은 순간이나 반대로 힘이 쪽 빠지는 고단한 감정을 애써 외면하며, 그 감정의 파도가 뇌세포 안으로 스며들지 않도록 버텨 나가는 일은 결코 녹록지 않다. 입으로는 늘 괜찮다고, 사람은 그리 쉽게 안 죽는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나 역시 괜찮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럼에도 나는 처음에 이야기한 그 자연스럽고 간단한, 그저 필요한 것을 서로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소통과 교감이 비교적 무난하게 이뤄지는 선량한 나의 사람들로부터 받은 위안과 감사로 버티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과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를 통해 말이다.
온갖 잡다한 감정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 세상에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며, 그 감사함만으로도 살아갈 이유 역시 충분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258-259쪽 사실 나는 괜찮지 않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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