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력 - 권기태 장편소설
권기태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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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고스란히 드러내서 탈락하느니 내가 아닌 체로라도 반드시 합격하고 싶었다.
84쪽

 

 

 중력을 벗어나려는 이진우의 열망은 솔직하고 집요했다. 이진우가 솔직하기만 했다면 아마 나는 김태우의 편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김태우가 가는 게 맞다고 그를 응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진우는 집요하기까지 했다. 실험과 그 분석에 천착해온 지난 시간들은 과거가 아니었다. 그것은 현재였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나? 어떤 요소가 작용했나?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변수는 무엇인가? 실패의 기로에서 그를 살린 것은 그의 분석력. 그의 말대로 과거는 죽은 게 아니라 살아 있었다.

 

 한국에서 치러진 선발 시험의 최종 단계인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그는 저렇게 이야기했다. 내가 아닌 체로라도 반드시 합격하고 싶었다고. 그때 그는 우주를 꿈꾸는 지구인의 몸이었지만 동시에 중력에서 벗어나 있었던 거라고, 나는 뒤늦게 이 책을 다 읽은 다음에야 이런 생각을 했다.

 

 [중력] 작품 초반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식물이 뿌리를 뻗는 것은 중력 때문이라고. 그러니까 식물 생존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중력이라는 말이다. 처음에는 그저 식물의 뿌리에게나 생존의 요소로 여겨졌던 중력은 이 작품의 중반과 후반을 거치며 결국 그 본래의 힘을 드러낸다. 식물 뿌리 정도나 살리는 거라고? 천만에. 태양이 저렇게 빛과 열을 낼 수 있는 것도, 지구상의 생물체들이 날마다 아무일도 없는 것처럼 눈 뜨고 호흡하고 달리고 열내며 살 수 있는 것도 다 중력의 힘이다.

 

 이진우(와 정우성, 김유진, 김태우)가 이것을 깨닫기까지는 혹독하고 예리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우주로 나갈 탑승자를 가리는 시험은 글로만 읽어도 뱃속이 울렁이며 속을 불편하게 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여기서 그만하자고 할까, 포기할까 싶다가도 아니야, 지금 그만둔다고 이 고통이 가실까, 조금만 더 참아보자. 그런데 이 다음에 더 큰 어려움이 오면 어떻게 해? 그렇다고 그만둘 순 없잖아. 정말 오만가지 생각의 폭풍우 속에서 이진우와 지원자들은 어떻게든 우주인이 되기를 갈망했다. 왜? 왜 그렇게까지 지구를 떠나보고 싶어하지? 남들이 가질 수 없는 스펙이라서? 쉽게 해볼 수 없는 경험이라서? 우주를 다녀오면 성공(명예와 권력)이 보장되어 있어서? 어릴 때 이루지 못한 꿈이라 평생의 한으로 남을 것 같아서?

 

 저자는 가가린센터에 가서 최후의 시험대에 오른 이진우를 비롯한 네 명의 인물을 통하여 독자에게 묻는다. 이들이 이토록 우주에 가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 열망은 어디로부터 기원하는지, 그렇게 그들이 갈망했던 우주에 다녀왔을 때 그들이 진짜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인물들이 부딪히고 공감하고 때로는 협력했다가 경쟁자가 되는 일련의 과정을 독자는 함께 겪으며 자문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왜 이토록 참혹한 경쟁에 스스로를 제물로 바치고 있는 것인가? 중력이 없으면 살 수 없는데 어째서 중력을 거슬러 자꾸만 위로, 위로 올라가려 할까? 붕 뜬 채로, 아무 곳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헬륨 풍선처럼 여기저기 부딪히는 형국의 우주인으로 정말 그렇게 살고 싶냐고 묻는다.

 

 그리고 이런 질문 앞에 이진우는 역시 솔직하고 집요하게 응수한다. 우주인 탑승의 기회를 완전히 날려버릴 위기 앞에서 그는 중력의 저 끝바닥까지 깊숙이 파고 들어간다. 누구도 닿아본 적 없는 생각의 바닥까지 내려간 그는 거기서 결정한다.

 

 

 앞날은 지금 나한테서 출발한다. 삶에는 승리보다 더 고귀한 것이 있다. 나는 살고 싶은 것이다. 속에서 솟구치는 삶, 진정한 삶을.
 410쪽 
 


 나는 이 소설이 정말 좋다. 그냥 좋은 게 아니고 많이 좋다. 정말 좋아서 권기태 작가가 그 전에 썼던 작품까지 찾아보게 되었다.
 우리는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우주의 먼지로 나서, 무중력의 공간 속에서 전쟁하듯 살아온 듯하다. 서로 밀치고, 내치고, 내가 올라온 사다리는 밀어내버리고, 그 무엇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무중력의 세계. 우리는 누구나 중력이 분명 필요하다. 뿌리를 내려야 하잖아. 잘못 내쳐지면 그대로 완전히 궤도 밖으로 밀려나서 미아가 되버리니까. 그러다가 누구의 레이더에도 들지 못한 채로 죽어버린다면 온 우주를 합친 만큼 슬프고 허망한 일이 아닌가. 그런 우주의 미아가 생기지 않도록 아니, 내가 미아가 되지 않으려면 나부터 중력에 나를 맡겨야겠다. 끌어안거나 품어주는 힘. 지켜주려고 애쓰는 힘. 연민이나 배려 같은 그런 힘. 아마 그런 중력을 가지려면 이진우의 말대로 용기나 인내심만이 아니라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김유진이 그랬듯 나도 지혜를 가지려고 애쓰려고.

 

 찢겨져서 붕 떠 있던 내 마음의 발목을 살포시 잡아준 소설. 그래서 그대로 밀려 올라가 미아가 되지 않도록 나를 끌어당겨준 소설.

 권기태의 [중력].

정우성이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쓴 것이 기억난다.
"태양의 그 모든 불꽃들을 뭉쳐서 둥근 공으로 빛나게 하는 힘이 바로 중력이다. 태양처럼 행성들을 데리고 홀로 사는 별도 있지만 별 두 개나 세 개가 중력으로 묶여서 쌍둥이나 남매들처럼 사는 경우도 있다. 서로 늘 힘이 미치면서. 이 모두에게는 중력이 삶의 조건이고 운명이다. 별들이 생겨나고 자라나고 무너지는 생로병사를 중력이 다 맡아서 다루는 것이다.
사람도 너와 나, 우리는 무게 없이는 살 수가 없고 무게가 있는 곳에는 중력이 있다. 중력은 바람과 강, 밀물을 당길 때는 공평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갈 때는 오로지 개별적일 뿐이다. 버릴 과거는 없다. 아무도 모르니까. 피할 미래도 없다. 씨앗이 움트고 있으니까. 운명을 사랑해라. 그리고 가능성을 시험해봐라. 나아간 만큼 너의 인생이 된다. 다시 일어난 만큼 너는 강해진다. 그러니 반드시 생각해라. 이것이 끝이 아니라고. 너는 더 멀리 날아가야 한다고."
나는 그것은 나의 생각을 쓴 것이고 나의 마음을 옮긴 것이라고 여겼다.
439-4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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