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에 미친 사람들 - 급이 다른 공부의 길
김병완 지음 / 다산북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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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의 공부란 매우 단순했다.
학창시절에는 그저 학교에서 시작종이 딩동댕 울리면 책상에 앉아 교과서를 보며 선생님의 수업을 듣는 것이었다. 보고 듣기, 어쩌다 외우기(라고 쓰고 벼락치기라고 읽기), 암기용으로 읽고 필사하기(라고 쓰고 깜지라고 읽는다). 이렇게 단순했다.


이렇게 단순했던 공부는 나이가 들면서 수준이 높아졌다. 30대에 이르러서야 내가 공부에 대하여 느낀 놀라운 사실은 이것이다. 공부란 결국 ‘사람’과 ‘나’에 대한 탐구라는 것.

 

 초등학교의 언젠가 나는 산수를 풀다가 궁금했다. 왜 사과가 몇 개인지를 셀 줄만 알면 되는 것이지 높이가 몇 미터고, 너비가 얼마고, 그 안에는 길이가 얼마고 따위,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속도나 무게 따위를 ) 왜 내가 알아야 하는가? 그런 거 몰라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살기야 살 수는 있다. 무엇이 ‘잘’ 사는 삶인가는 개인마다 의미가 다르므로 그것은 뭐라 딱히 규정할 수는 없으나, 살기는 살지. 하지만 굳이 매슬로의 5단계 욕구까지 끌어오지 않아도 어른이 되고 나니 이해가 되었다. 그 모든 기초 학문, 학교에서 반강제로 주입하던 내용들은 나와 내가 살아가는 이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기본적인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맹점이 있다. 아주 분명하고 치명적인 맹점. 고등학교를 다 나오고 난 후에도 나는 나와 내가 살아가는 이 세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1도 없다는 말은 여기에 써야 맞겠다. (나만 그랬던 것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그때부터 나는 아마 은연 중에 또 다른 공부의 세계로 들어섰던 것 같다. 진짜 공부. 처음에는 이 세상을 이해하고 싶어서 시작했던 공부였는데 이제는 안다. 그것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공부가 아니었다. 가장 먼저는 ‘사람’, 그래, 사람을 이해하는 게 내 공부의 첫 번째 목표였다. 사람이라는 존재를 이해해야 너무나 중요한 ‘나’라는 존재도 이해가 될 테니.

 

 하지만 공부를 하면서 여러 번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사람을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사람만 이해한다고 해서 ‘나’라는 존재까지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것 아니더라. 그걸 깨달은 다음부터 모든 공부 그러니까, 읽는 거의 모든 책에서 나는 저자가 쓴 글을 거울 삼아 ‘나’를 발견하려고 애썼다.

 

 이 책은 제목부터 파격적이다. [공부에 미친 사람들]. 표지가 얼마나 고급스러운지, 나도 저런 제목이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여기에 실린 동서고금의 지식인들은 단순히 외우고 쓰는 기계적인 암기에 능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이들의 공부의 공통점을 하나 꼽자면 ‘발견’이라고 하고 싶다. 소크라테스도, 공자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라고 그토록 강조했고 아인슈타인의 공부법 역시 자기의 세계, 자신의 상상력을 한계없이 부려보는 자기 발원 스타일이었다. 그런 공부법들의 모두 공부에 나서는 주체로 하여금 놀라운 것, 그 전에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그 발견한 것들을 책으로 학문으로 온갖 결과물로 나타내고, 역사 속에 진한 자취를 남겼다.

 굳이 세상에 이로운 사람이 되거나, 어떤 대단한 업적을 내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공부를 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나의 공부 동기는 ‘사람과 나’를 제대로 발견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나의 동기가 공부 그 자체의 세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좋은 동기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아마 올해는 공부운이 트이려나 보다 ^^ 좋은 책의 격려를 받으며 시작하는 것을 보니 말이다.

왕양명의 제자들이 스승의 어록과 편지를 엮어 집대성한 책 [전습록]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자고로 사람은 배워서 얻은 게 있으면 실천하여 자신을 향상시켜야 한다.
지는 행의 시작이며, 행은 지를 이룬다.
이 두 구절은 ‘지행합일론’에 대한 왕양명의 사상을 명확하게 알 수 있는 대목으로, 왕양명전집에 나오는 "앎은 실천의 시작이요, 실천은 앎의 완성이다. 앎과 실천을 둘로 나눌 수 없다"라는 말과 함께 공부에 대한 왕양명의 철학을 집약하여 보여준다.
왕양명은 현실 세상과 큰 괴리를 보이며 실천은 등한시한 채 공리공론만 일삼는 주자학을 허학 또는 위학이라고 칭하며 통렬히 비판했다. 그만큼 깨달은 것을 반드시 실천해야 진정으로 아는 것임을 강조한 학문이 양명학이다. 그리고 이를 쉽게 표현한 이론이 앞에서 말한 ‘지행합일론’이다.
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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