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의 집 별글클래식 파스텔 에디션 13
헨리크 입센 지음, 신승미 옮김 / 별글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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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의 귀염둥이를 자처하며 남편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여자가 있다.


 남편을 살리기 위하여 법을 어긴 그녀는 ‘남편의 목숨을 구하려 했던 자신의 동기’를 법은 고려하지 않는다는 말에 코웃음을 치며 아주 멍청한 법이라고 응수한다.
 만약 멍청한 것이 법 하나 뿐이었다면 그녀는 여전히 지금도 인형의 집에서 살고 있을까? 동기를 고려하지 않는 것은 그녀의 남편도 마찬가지여서, 그녀는 결국 그녀의 편이 되어줄거라고 철썩같이 믿었던 남편의 이기적이고 편협한 민낯을 생생하게 목격하고야 만다.


 다행히 멍청하지 않았던 그녀는 지금까지 그녀의 둥지가 되었던 모든 것이 실은 인형놀이를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모든 것을 버린 채 집을 나온다.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은 읽을 때마다 놀랍다. 먼저는 극 초반의 노라가 얼마나 유치하고 미성숙한 인물인가에 놀라고 중반에는 노라와 나의 교집합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에 놀라고  후반에는 노라가 받아들이는 그 충격적인 현실 인식과 그에 기반한 그녀의 냉철한 선택에 놀란다.

 

 헨리크 입센이 [인형의 집]을 발표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150여 년 전이지만 작품 속의 노라와 헬메르가 대변하는 여성과 남성 혹은 종속된 자와 구속하는 자 그리고 미성숙한 인간과 기만적 인간의 관계는 옛날의 어떤 것이 아닌 지금의 문제로 인식된다. 최근에는 배두나, 차태현 주연의 드라마 [최고의 이혼]에서 차태현이 맡은 조석무라는 인물에게서 짙은 헬메르의 향기를 느끼며, 심지어 조석무와 아내 강휘루가 대화를 나누고는 있어도 전혀 소통이 되지 않는 모습을 시청하다 휘루가 ‘당신은 날 사랑하는 게 아니야’라는 말과 노라가 ‘당신은 사랑에 빠져 있는 기분을 즐긴 것’이라는 일침이 머릿속에서 오버랩되는 기묘한 경험을 하는 중이다.

 

 헬메르  그렇지만 가정을, 남편과 아이들을 다 두고 떠나다니.... 대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노라  그것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어요. 내가 아는 건 이게 나 자신을 위해 꼭 필요한 선택이라는 것뿐이에요.
헬메르  하지만 수치스러운 짓이야. 당신의 가장 신성한 의무를 저버리려는 거 아닌가?
노라  나의 가장 신성한 의무가 뭔데요?
헬메르  그걸 꼭 이야기해야 알겠어? 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의무를 말하는 거잖아.
노라  나에게는 그것 못지않게 신성한 다른 의무도 있어요.
헬메르  그런 건 없어. 대체 무슨 의무를 말하는 거야?
노라  나 자신에 대한 의무요.
헬메르  무엇보다도 당신은 아내이자 어머니야.
노라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무엇보다 나는 당신과 마찬가지로 사람이에요.... 최소한 그렇게 되려고 노력할 거예요. 토르발, 대부분의 사람이 당신의 생각과 같으리라는 것을 알아요. 책에도 그렇게 쓰여 있을 거고요. 그렇지만 더 이상 나는 대부분의 사람이 하는 말과 책에 쓰여 있는 말로 만족할 수가 없어요. 이제 나 스스로 생각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할 거예요.
180-181쪽

 

 브라보! 가장 신성한 의무는 나 자신에 대한 의무라는 노라의 말은 지금 우리가 다시 한 번, 누구라도 이 작품을 읽어봐야 할 가치를 증명한다. 내가 나를 홀대하지 말아야 할 의무, 내가 나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깨닫고 그 가치대로 삶을 경영해나가야 할 의무는 여성이나 남성이나 성인인가 아이인가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니다. 우리는 오늘 당장이라도, 누구라도 나 자신에 대한 의무를 떠올려봐야 하지 않을까. 나 자신에 대한 의무를 스스로가 소흘히 혹은 가볍게 여겼기에 오늘 우리는 여러 면에서 우울하고 분노하고 절망하고 지친 상태로 꾸역꾸역 살아가게 된 것 아닌가 한다. (단, 여기서 덧붙이고 싶은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삶이 자기 멋대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자기 욕망대로 사는 삶은 결코 아닐 것이라는 나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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