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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루의 영원한 밤
김인숙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평점 :
처음에 이 낯선 작품들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조금 헤맸다. <델마와 루이스>에서 델마 할머니의 가족들의 이야기를 읽기 시작하여 델마 할머니의 이야기, 루이스 할머니의 이야기 그리고 그 두 할머니가 거리로 나서면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갈 때 혼란스러웠다. 왜 제목이 델마와 루이스지? 왜 이 두 할머니는 제대로 된 이름이 나오지 않는거야? 결말 꼭지 부분에 이르러서야 저자는 이 작품의 제목이 영화 <델마와 루이스>에서 빌어온 것이 맞다는 확인과 함께, 그러나 그 영화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점 역시 맞다는 확인을 해 준다. 불친절한 저자와는 달리 이 작품의 결말은 친절하다. 두 할머니들은 집을 나온 채로 죽음에 이르지 않을 것이고, 그 두 할머니의 가족들은 할머니들의 장사를 외지에서 치른 후에 겪을 기묘한 분노와 당혹감, 의문에 휩싸인채로 여생을 보내지 않을 터다. 할머니들은 이제까지의 삶이 그러했듯 가족의 옆에서 그들의 염치를 증명하다가 아무런 잡음도 남기지 않고 소천하고 남은 가족들은 또 그들의 생애를 따라 살아가겠지.
첫 작품을 읽고 나서 <아홉번째 파도>, <토기박물관>을 읽으면서 나는 저자가 짚어내는 지겹고도 지겨운 삶의 맥을 따라 가게 되었다. 그 맥은 참 고단하면서도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징글징글하면서도 그렇게 쉽게 떨쳐지지 않는 묘한 박동이었다. 분명 더 나은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는 데로 하지 못하는 삶. 갯바위에서 던지면 분명 아홉 번째 파도에 이르기 전에 월척을 낚을 수 있게 될 좋은 낚싯대를 수중에 쥐고도 예전의 선택을 다시 하게 되는 여자(<아홉번째 파도>의 인물)나 남편이 죽은 후 지나온 삶의 조각을 꿰어 맞추며 이리저리 분열하며 어그적거리는 생애를 살고 있는 여자(<토기박물관>의 미라)의 이야기는 지겹다 못해 슬프기까지 했다. 이 슬픔은 <넝쿨>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내 기억이 진실이 아닐 때 벌어질 수 있는 일이란 여러 가지가 있다. 어제 술값을 계산했던 게 내 친구인 걸로 기억하는데 실은 나였을 때 다음달 카드값 청구서가 꽤나 묵직하겠지. 그리고 내 식사는 가벼워질 터다. 새로 알게 된 거래처 직원이 하도 낯이 익어 대학 동창인 걸로 기억해냈는데 실은 학부 때 미팅으로 만나 아주 더럽게 헤어진 썸남이었을 때, 당분간 회사 생활이 골치 아파지겠지. 기억이란 시간과 공간이 채색하는 대로 갖가지 색을 덧입거나 지우기 마련이다. 더구나 사람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 중 자기방어력이 가장 강한 생물아닌가. 왜곡되고 비틀려진 기억, 그리고 그 기억이 불러온 비극. 영국의 소설가 가즈오 이시구로가 이 주제를 아주 세련되고 날렵하게 잘 다루었는데, 그의 소설을 읽을 때보다 좀더 명료하고 쓰린 충격을 준 작품이 <넝쿨>이다.
<넝쿨>이 그린 사건 때문에 충격을 받은 것은 아니다. 내가 진범이라고 지목하여 사회적으로 사형을 당하고 실제로 투옥되어 형을 살고 있는 인물이 실은 진범이 아니었다고, 진범이 따로 있었다는 전개는 아프지 않다. 그것은 놀라움의 일이지 아픔의 일이 아니다. 내가 아팠던 부분은 주인공 형윤의 의식이었다. 범인을 잡고 난 이후에 피해자가 감당해야 하는 공포와 충격. 진범이 밝혀지고 난 이후에는 가해자가 응당 받기에 마땅하다고 여겨지는 비난과 자기 자신이 주는 자책이라는 채찍질이 더해져, 그녀는 실로 순교자 같았다. 그녀 자신도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그녀의 기억을, 단 한 번도 재생하기 싫은 그 끔찍한 순간들을 여러 번 오가며 그녀가 스스로에게 가하는 징계는 가혹하고 처절했다. 누구에게라도 이 순간의 원인을 떠맡기고 싶어지는 밤,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가해자여서 어디 피할 데도 없어진 형윤은 하느님이야말로 이 게임의 범인이 아니냐고 묻는다.
같은 가해자가 된 형오(형윤의 오빠)는 타국으로 도망을 가는 길을 택했으나 그녀는 아니었다. 형윤은 그녀가 짊어져야 하는 생애를 악을 쓰고, 눈을 부릅뜨고 견디는 쪽을 택했다. 이런 삶이라도 견디고 있다는, 도망가고 싶고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지만 그저 여기 있기를 택한 형윤의 의지는 <넝쿨>의 뒤를 이어 전개되는, 이 책의 표제작 <단 하루의 영원한 밤>으로 이어진다.
“세상에는 분명히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 있다고. 그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고 개체마다 다르게 시작되는 운명의 차원이나 상처의 방식도 아니라고. 그것은 존재의 방식이라고. 더럽고, 냄새나고, 그저 꿀떡꿀떡 삼켜야 하는. 그런 생각이 없었다면 여자는 어떻게 그 험한 세월을 다 견뎌올 수 있었을 것인가. 그녀는 자신이 남들과 다르지 않다고 믿었고, 남들과 다르지 않은 가장 중요한 그것은 오직 그들이 동일한 존재의 방식으로 살아 있다는 사실 뿐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150쪽)”
이 한 구절이야말로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여러 개의 이야기와 다양한 인물들과 그 수많은 삶을 꿰는 단 하나의 실이 아닐까 한다.
어린 제자와 동행했던 하룻밤에 P선생은 어린 제자와의 사이에 아이가 생겼다. 그때 P선생은 악몽을 막아준다는 깃털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이후 P선생의 일생은 온통 악몽의 도가니에서, 도저히 삼켜지지 않는 그 생애를 삼키려 경련하는 시간이었다. P선생의 사생아인 M의 연이이었던 화자는 M으로부터 악몽을 막아준다는 깃털장식을 선물 받았다. 그러나 화자 역시 인간의 도리를 거스르는 상상, 이를테면 헤어진 M을 다시 만나려면 P선생의 장례식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다 스스로를 부끄러워한다. 그러다 실제로 P선생의 장례 소식이 전해지고, 그 장례식장에서 화자는 P선생과 그 여인 그리고 M에 대한 무성한 소문을 입밖으로 확인하고는 그런 것 따위를, 누군가의 악몽 따위를 서슴없이 전하고 믿는 부끄러운 인생들의 모습을 확인한다. 그 밤, 화자는 생이 통째로 멈출 길 없이, 덜커덕 달리고 있어 사람은 통증을 잊기 위해 꿈속으로 들어가고 참회를 하지만 그 역시 잠꼬대에 불과하며 생은 영원히 반복되는 또 하나의 밤이라는 사실을 느낀다.
우리는 지금 모두 밤을 통과하고 있다. 하지만 밤은 깊어가도 끝나는 대신 영원히 반복될 뿐이다. 그 밤을 빗겨가는 길은 꿈이지만 꿈에서의 생애는 잠꼬대. 그러니 살아있는, 살아가는 태도는 악착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나이 든 교수의 아이를 가진 미혼모가 된 여자가 보리밥을 욱여넣어 삼키고는 방귀를 뿡뿡 뀌는 우악스러운 몰골일이지라도, 이미 태어나 시작된 존재의 방식을 부정하지 못하고 살아낸다. 고고한 교수가 온갖 오물보다 더한 루머와 오명 속을 악몽을 꾸듯 거닐어도 그만의 존재 방식으로 살아간다.
별난 능력도 없고, 대단한 사람도 아닌 그냥 평범한 대다수의 사람들도 오늘 현실 속에서 밤 같은 하루를 보냈다. 이미 시작된 생애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일은 존재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윤처럼 자신도 모진 일을 당하고 누군가에게 역시 모진 일을 행했을지라도, 미라처럼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일들을 더듬어 꿰어 맞추는 쓸쓸하고 혼란스러운 말년일지라도, 두 번의 이혼 끝에 실패자(본인 기분으로는 쓰레기)가 된 기분으로 아들의 눈물조차 헤아리지 못하는 아빠(<아주 사소한 히어로의 특별한 쓸쓸함>의 주인공)일지라도 그냥 거기 살아있음으로 해서 존재한다. 그 안에서 꿈을 꾸거나, 고요한 비밀에서 가만히 빗겨 있는 채로 생이 평탄하다고 착각하거나, 아니면 특별한 쓸쓸함을 마주하는 시공인 밤. 밤은 때로 고통으로 때로 위로하며 이들을 덮는다. 그래서 때로 영화 주인공 같은 순간을 보내기도 하고(델마 할머니), 슈퍼히어로가 되기도 하면서 생은 통째로 덜커덕 달리는 것이다.
사람은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을, 심지어 그 자신에 대한 것조차도 다 알지 못한 채로 생애를 살아간다. 그 사이에서 사람이 겪는 혼란과 갈증, 끝도 없고 해결할 수도 없는 불만들은 그 자신이 유별나게 문제적 사람이기 때문이라거나 어딘가 하자가 있어서가 아니라 어차피 사람이란 다 알 수 없는 존재이기에 겪는, 누구에게나 동일한 한계이자 짐인 것 아닐까.
사람이 겪는 이 한계와 짐 그러니까 밤 같은 인생의 어려움을 소설로 그려낸 저자는 위로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이야기를 건넨다. 말하자면 ‘인생 다 그래요. 그 생애는 그 개체만의 것, 아주 사소하고 별거 없지만 이미 시작된 것이고 나 자신에게만은 사소하지 않아요.’라는 쓸쓸하고 달콤한 느낌으로.
언젠가 이 쓸쓸하고 달콤한, 특별한 쓸쓸함을 지금보다 더 깊이 느끼게 되는 나이에 나는 내 단 하루의 영원한 밤을 반추하기 위하여 혹은 다가올 밤을 지낼 소박한 용기를 얻기 위하여 이 단편집을 다시 찾게 될 것 같다.
"세상에는 분명히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 있다고. 그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고 개체마다 다르게 시작되는 운명의 차원이나 상처의 방식도 아니라고. 그것은 존재의 방식이라고. 더럽고, 냄새나고, 그저 꿀떡꿀떡 삼켜야 하는. 그런 생각이 없었다면 여자는 어떻게 그 험한 세월을 다 견뎌올 수 있었을 것인가. 그녀는 자신이 남들과 다르지 않다고 믿었고, 남들과 다르지 않은 가장 중요한 그것은 오직 그들이 동일한 존재의 방식으로 살아 있다는 사실 뿐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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