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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의 죽음
김석범 지음, 김석희 옮김 / 각 / 2015년 11월
평점 :
품절
스스로의 소개에 따르면 저자 김석범은 ‘한국 국적도, 북한 국적도 가지지 않은 한 마디로 무국적자’다. 아흔살 평생에 한국 땅에서 지낸 해가 다섯 손가락이 채 안 되는, 남이나 북이 아닌 통일 한국이라는 국적을 원하는 사람이다. 기묘한 위치에 서 있는 저자의 특별한 관점과 통찰이 오롯이 담긴 다섯 편의 단편을 엮은 것이 [까마귀의 죽음]이다.
가즈오 이시구로를 매우 좋아하는 이유와 김석범 작가를 좋아하는 이유가 같다. 평생을 이방인으로, 어딘가에 닻을 내리고 단단히 머무른 삶이 아니라 언제나 부유하고 유리하는 듯한 삶을 살아야 했던 그래서 관찰에 충실한 입지를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작가들의 작품이란 이렇게 분명하게 닮은 데가 있다.
책의 첫 번째 작품은 ‘간수 박 서방’이다. 제주경찰서 간수인 박백선은 얼굴은 본래 노비였다. 노비 시절 이름 대신 곰보라고 불리거나 죄수들에게 나쓰미깡(일본어로 귤)이라고 놀림을 받을 정도의 얼굴을 한 이 남자는 키는 작고 나이는 마흔 가까이 되었다. 해방이 되어 노비에서 평민이 된 그는 제주도로 흘러들어와 간수가 되었다.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찌질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의 눈에 형편없는 인간으로 비치는 그가 그의 인생 끝에서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 되어 죽는지 그린 작품이다. '나는 대한민국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를 않아요.'라는 그의 유언이 아주 아주 강렬하다.
두 번째 작품은 [까마귀의 죽음]이다. (첫 번째 작품인 간수 박 서방, 이 작품 까마귀의 죽음 그리고 세 번째 수록 작품인 관덕정은 연작이다. 시대와 상황이 같고 다만 인물이 다르다.)
'간수 박서방'에 비하여 훨씬 복잡하고 밀도 높은 작품이다. 주인공인 정기준의 행적을 따라가며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절대적인 선인도, 악인도 없다. 다만 사람은 선택할 뿐이고 때에 따라 변화할 뿐이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절대적 최후 앞에서 나 자신은 과연 선과 악 둘 중 무엇에 가까운 사람으로 남을 것인가? 저자가 독자에게 펼쳐 보여준 당시 제주도의 민낯과 인물의 대사와 행동을 빌어 던지는 질문들이 교차하며, 제주4.3사건은 역사로만 묻히기엔 아직 이르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무엇보다도 저자가 진단한 제주4.3사건의 원인은 오늘날의 한반도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불씨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이 소설이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사상과 국적의 굴레에 얽매이지 않은 저자는 이야기 전반에서 제주의 비극은 사상 싸움도, 아둔한 민중 간의 혈투도 아닌 미국의 폭정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호소한다. 열강의 무자비한 전략에 우리가 돌이킬 수 없는 많은 생명을 잃어야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에도 언제든지 비슷한 사건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것. 이것을 인지하게 하는 것만으로 제주4.3사건 그리고 그를 그 어떤 소설보다 면밀하게 분석하고 묘사한 이 작품 [까마귀의 죽음]은 시간을 초월하여 오늘날 한반도에서 여전히 뜨거운 사건이고 작품이어야 한다.
백선은 명순이 생각나서 가슴이 메었다. 그 처녀는 울어서 퉁퉁 부은 얼굴로, 자기가 죽여야 할 노파를 찌르지 않고 그냥 서 있었다. 노파는 처녀에게 등을 돌리고 주저앉아 있다가, 합장했던 손을 떼며 갑자기 숨이 끊어질 듯 외쳤다. "아이고, 이게 무슨 지랄 같은 놈의 세상인고." 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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