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아픔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통영 여행을 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박경리 기념관이었다.

 

 작가 박경리가 그의 일생동안 무엇을 쓰기 위하여 그토록 애썼는지 알려고 했던 적은 없었다. 그가 쓴 소설들을 여러 권 읽었고 보통은 남성 작가의 이름으로 오해하는 이름을 가지고 살며 그가 만만치 않은 생애를 보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진실로 글로써 남기고자 했던 메시지의 본질에 대해서 고민했던 적은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박경리 기념관에서 너무나도 낯설고 새롭고 기묘한 작가 박경리를 만났다. 아, 이미 내가 그 얼굴을 익히 만나고 있었으나 제대로 본 것은 기념관에서가 처음이었다고 말해야 옳을까?

 기념관에서 건져온 가장 값진 생각은 이제 박경리의 소설이 아니라 그가 남긴 에세이를 찾아서 읽어야겠다는 것이었다. 전시관의 거의 끝 자락에서였던가, 벽면에 게시되었던 박경리 작가의 에세이 한 편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자본주의와 생명, 산업과 농업의 대비를 이토록 깊고 무겁고 넓은 파동의 울림으로 전달하는 글이라니. 나는 몇 번이고 그 글을 읽고 그 글귀를 사진으로 찍어 집으로 돌아오는 날 기차에서 꺼내 읽어보았다. 그리고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이따금 저장했던 사진을 거듭 꺼내보곤 했다.

 

 [생명의 아픔]은 박경리 작가가 여러 가지 경로로 발표했던 원고나 강연 내용을 모아 엮은 책이다. 29편의 글이 담겨 있고 모든 글은 ‘생명’이라는 하나의 주제 아래에서 여러 모양과 형태의 맥박으로 뛰고 흐른다.

 

 세계는 지금 개방되어 지구라는 단위 속에 인류는 공존하지 않으면 안 되고, 부정해야 하는 것은 인류의 생존을 저해하는 것이지 인간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37쪽

 

언어는 내용의 수단이기 때문에. 41쪽

 

 사실 신물 나는 경제 얘기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외국에서 돈을 더 빌려온다고 권도살림이 끝날 것인지 의심스럽고 생산을 독력한다 하더라도 세계의 시장은 무한한 것도 아니다.  그러면 우리들 인류가 살아남을 길은 어디에 잇을까.
 그것은 단순 명료하다. 먹을 것, 입을 것, 눈비 가릴 주거의 확보. 이같이 생존을 위한 기본만 보장이 된다면 두려울 것이 없다. 그 기본을 보장하는 것이 지구라는 터전이며 땅이다.
 우리는 지구를, 땅을 얼마나 생각했을까. 진실로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생태계를 얼마나 생각했을까.
 지폐보다, 황금보다 우리의 생존을 떠받쳐주는 것은 바로 터전인 것이다.
 먹을 것도 거기서 나고 입을 것도 거기서 나고 집도 터전 위에 세운다. 무엇이 먼저이며 나중인지 사람들은 그것을 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기본은 줄어들고 상처 받으면 훼손되고, 생존의 방식보다 생활양식이 우선되어 쓰레기만 쌓이는 세상, 시장이나 상점을 상상해면 알 것이다.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보다 그렇지 않은 것이 훨씬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물자는 한정되어 있다. 에너지도 한정되어 있다.  218-219쪽

 

 

한 편, 한 편을 얼마나 차지게 물고 씹고 되새기며 읽었는지 모른다.
일본을 논하는 글에서조차, 그저 일본을 책망하는 글로만 남지 않는다. 그 글이 엄중한 규탄으로 폭발적인 함성으로 터져 나오게 만드는 불씨, 그 불씨는 ‘생명은 소중하다’는 작가의 가치관이었다. 그리고 그 불씨 덕에 책 전체에서 작가가 그의 생애 동안 일관되게 이야기 했던 ‘생명’이라는 주제가 그 의미 그대로 생동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생명이라는 것의 가치를 이토록 귀하고 빛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작가의 글이란 너무나 강력하다.

새삼스럽지만, 영면에 든 박경리 작가가 너무 그립다. 단 한 번도 말이나 시선을 섞어본 일이 없는 분이지만, 같은 공기라도 마시고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언어는 내용의 수단이기 때문에. 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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