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 날다 - 미투에서 평등까지
송문희 지음 / 행복에너지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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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교 1학년 봄, 나는 풍물동아리에 가입했다. 동아리 첫 엠티는 어느 호숫가 펜션. 주량이 센 편이긴 하지만 아직 선배들도 어렵고, 학번 차이가 꽤나 나는 고령의 선배들도 여럿 와 있는 자리여서 나는 분위기만 어느 정도 맞추다 일찍 잠이 들기로 했다. 악명 높은 사발식도 무사히 치르고 왁자지껄하게 한밤의 음주를 즐기기를 몇 시간, 나는 자정쯤에 조용한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덮고 잠이 들었다. 그로부터 얼마가 지났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지만, 아마도 한두 시간도 채 안 되었던 것 같다. 누가 내 몸 위에 올라타 있는 듯 답답한 기분이 들어 잠이 깼다. 의식이 돌아오는 동시에 나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잠시 얼음인 상태로 굳어버렸다. 한 학년  위인 남자 선배가 내 위에 올라타서 정신없이 내 입술을 물고 빨고 있었다. 몇 초 간 이게 꿈인가 싶어 눈동자를 굴리다 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상체를 발딱 일으켰다. 만취 상태였는지 아니면 자고 있던 내가 깨서 놀라서였는지 그 선배는 내가 일어나는 통에 옆으로 엎어졌고 그 자세 그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놀라고 어찌할 바를 모르던 나는 그대로 일어나서 방을 나와 사람들이 놀고 있는 방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술자리가 한창인 그 방 앞에서 나는 들어가서 누구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엉거주춤 멈춰 섰다. 나는 당황했다. 어, 이거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내가 방금 당한 일을 선배들에게 이야기하면 저들은 뭐라고 할까? 이게 내 수치인 건 아닐까? 내가 이런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하는 게 맞는 걸까? 혼자 어리바리하게 서 있던 나는 그때 방에서 나오던 여자 선배와 마주쳤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성희롱이나 성폭행은 권력을 등에 업고 하는 성적 갑질이다. 이러한 피해에 대해 세부적으로는 서로 어느 정도 인지를 하고 있더라도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조직 내에서 너무 공고화된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 말해 봤자 2차, 3차 피해가 오히려 걱정되는 상황이라면 쉽게 도와주겠다고 나서기가 쉽지 않다. 성적인 문제는 어쨌든 제3자가 개입하기가 좀 어려운 부분도 있는 데다 특히 끼리끼리의 패거리가 폐쇄적인 조직 문화인 경우는 일정한 서열 체계 안에서 권력자의 눈에 비껴나게 되면 엄청난 응징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직 내에서 권력 갑질에 순응하며 성폭력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고 그들을 외면했던 모든 사람들 역시 가해자다. 피해 여성들이 그동안 침묵할 수밖에 없엇던 가장 큰 이유는 ‘말해봤자 안 바뀌는 사회’에 있다.
93쪽

 


 엠티를 다녀오고 난 다음주에, 나는 월요일 아침부터 동아리방을 찾아갔다. 문제의 남자 선배를 마주칠 수도 있어 너무 불편하고 싫었지만, 어쨌든 여자 선배들을 만나서 이야기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동방에는 여자 선배들이 분식을 먹고 있었고 나는 언니들만 있어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 날 밤, 그 남자 선배가 나에게 한 일을 이야기하고 나자 마음은 더 가벼워졌다.

 

 

 윤김지영은 미셀 푸코의 ‘파르헤지아(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처벌이나 후환을 두려워하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는 행위)’ 개념을 빌려 여성들의 ‘폭로’ 행위가 ‘두려움 없이 말하기’의 양식이라고 설명한다. 폭로는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권력 차이가 클 때 약자인 피해자가 선택하는 가장 절박한 수단이다. 이것은 ‘폭로’라는 수단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피해를 사회 시스템 안에서 재기할 수 있는 제도적·사회문화적·인식적 기반이 부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실적으로 피해자들의 외침을 남성 중심적인 법 해석과 오히려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문화로 인해 무력화되곤 했다.
22-23쪽

 

 

 이야기를 털어 놓은 후,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들을 마주해야 했다. “야, 걔가 원래 그래.”, “괜찮아, 별거 아냐.”, “걔가 너 좋았나보다.”, “CC 탄생이야?”, “그냥 잊어버려, 해프닝이지, 뭐.” 나는 방 안에서 철저하게 혼자였다. 나는 그 밤에 내가 당한 일을 어떤 이유로도 이해할 수 없고, 전혀 괜찮지 않고, 대단히 불쾌했으며 너무너무 싫었고 이 일에 대한 사과를 받고 싶었다. 낯선 사람이 아니라 평소에 편하게 가깝게 지내던 선배가 나에게 한 행위여서 더더욱 이상하고 소름끼쳤다.

 

 

 특히 남성중심의 사회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관계성이 없는 ‘낯선 강간’만이 성폭력으로 인정된다. 아는 관계나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단순 강간’은 피해의 진정성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61쪽

 

 

 나는 누구에게 호소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학교게시판에 익명으로 쓸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분명 그 후폭풍의 감당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아는 언니들한테 이야기했음에도 전혀 위로나 해결책을 얻지 못했는데 익명의 사람들이 나에게 공감해줄리 만무했다. 잘못했다간 내가 손가락질을 당할 것 같았다. 결국 나는 그 남자 선배를 피해 다니며 혼자 속앓이를 하다 1학년을 보냈다. 지금도 그 때를 떠올리면 참 이상한 기분이 든다. 왜 분명 나는 피해자였고 내가 당한 피해가 있는데 가해자는 없는가? 왜 나의 호소에 대해서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는가? 그 선배가 원래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이었다면 왜 그 어떤 선배도 나에게 미리 귀띔이라도 해주지 않았는가? 이제야, [펭귄 날다]라는 책을 읽으면서야 나는 깨달았다. 아닌 밤중에 날 덮쳤던 그 선배, 그리고 묵인과 방조로서 나를 할퀴었던 또 다른 선배들, 그들 모두가 나에겐 가해자였다

 

 

 이윤택 연출가가 연극배우들을 상대로 “내 방으로 와서 안마를 해 달라”며 지속적인 성추행을 할 때 안 들어가겠다고 저항하던 단원은 “너는 왜 이렇게 이기적이냐”라는 주변의 비난을 들었다.
 이들은 여기서 한 술 더 떠 피해자에게 함부로 낙인찍기에도 가세한다. “너도 뭔가 잘못을 했겠지, 평소 옷차림이 좀 야했어.”, “그때 바로 문제 제기하면 되지 왜 지금 와서 말해?”, “회사 시끄러워지니까 좋냐? 좋은 게 좋은 거니 좀 참지 그래.” 이런 말들은 피해자의 가슴에 날아와 꽂히는 무서운 독화살이 된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어떠했는가? 남성, 여성을 떠나 사회 곳곳에 만연해있는, 죄의식 없이 일상처럼 되풀이되고 있는 수많은 성범죄의 순간을 목도하면서 ‘나는 당당하게 나섰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 어쩌면 쉽사리 용기를 내지 못하고 이를 방조하고, 적극적으로 같이 나서 주지 못했던 우리 모두가 가해자인지도 모른다.
94쪽

 

 

 송문희 저자가 쓴 [펭귄 날다]는 요 근래 나온, 내가 읽었던 페미니즘 주제의 책 중에서 가장 대한민국 현실을 잘 반영한 책이다. 왜 ‘안태근 성추행 의혹 사건’이 아니라 ‘서지현 검사 성추행 사건’이라고 불리는지, 왜 그 어느 나라보다 대한민국 남성에게도 페미니즘이 필요한지, 왜 ‘남성 몰카 편파 수사’ 주장 등에 일부 담겨 있는 극단적 남혐이 위험한지 저자는 대한민국 현실 속 성차별 문제를 낱낱이 해부하여 조명해낸다. 


 개인적으로 온라인 상에서 성차별 문제가 다뤄질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여자만 성차별을 당하냐? 남자도 당한다. 그러니 징징대지 말라.’라는 반응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남자도 당한다면 남녀가 함께 성차별을 타파해야 할 게 아닌가? 피해는 다 똑같은 수준으로 당하고 있으니 다 같이 입 다물고 사는 게 옳다는 식의 주장은 참으로 기이하다. 저자는 이런 차원에서 페미니즘이란 여성의 지위 확보가 아닌, 남녀가 함께 자유로운 세상을 건설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라고 정리한다. ‘배워야 평등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다’는 저자의 글에 십분 동의한다.

 

 2018년의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미투의 한가운데에서 우리 모두는 저 말을 깊이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남녀 모두가 배워야 제대로 살 수 있다는 개념이 필요하고 그를 위해서는 양질의 토론과 양질의 독서 읽기가 필요하다. 외국의 저자들이 외국의 사례를 들어 쓴 수많은 페미니즘 책이 있지만 그런 책 몇 권 보다 이 책 한 권 읽기를 추천한다.



특히 남성중심의 사회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관계성이 없는 ‘낯선 강간’만이 성폭력으로 인정된다. 아는 관계나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단순 강간’은 피해의 진정성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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