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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나날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가즈오 이시구로라는 작가에게 나는 첫눈에 반했다.
그가 발표한 가장 첫 번째 작품이자 내가 이 작가를 발견하게 된 계기인 [창백한 언덕 풍경]을 읽는 내내 나는 내가 기어코 이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게 되리라는 걸 알았다.
어쩜 이렇게 잘 쓸 수 있을까?
[남아 있는 나날]을 읽으며 나는 매 순간 싸웠던 것 같다. 작품을 동경하는 마음과 질투하는 마음, 둘 중 어느 쪽에 힘을 실어줘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남아 있는 나날]의 무대는 근대 영국이다. 주인공은 영국 귀족(달링턴 경)을 일생토록 섬겼던 그의 집사 스티븐슨이다.
스티븐슨은 위대한 인물인 달링턴 경을 모시며 그의 위업을 보좌했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느끼는 인물이다. 이 책은 그의 독백이다. 그는 품격 높은 자화자찬으로 이 책을 도배한다.
위대한 집사들의 위대함은 자신의 전문 역할 속에서 살되 최선을 다해 사는 능력이다. 그들은 제아무리 놀랍고 무섭고 성가신 외부 사건들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점잖은 신사가 정장을 갖춰 입듯 자신의 프로 정신을 입고 다니며, 악한들이나 환경이 대중의 시선 앞에서 그 옷을 찢어발기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그가 그 옷을 벗을 때는 오직 본인의 의사가 그러할 때뿐이며, 그것은 어김없이 그가 완전히 혼자일 때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품위’의 요체이다.
57-58쪽
스티븐슨이 가장 집중하는 화두는 ‘품위’다. 그는 자기자신이 집사로 태어나 위대한 집사에 걸맞는 능력으로 인류의 안녕에 공헌한 품격 있는 인간이라고 믿는다. 평생을 위대한 집사의 명성과 영광에 한 치의 흔들림이 없는 일생을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달링턴 경의 대저택을 오차 없이 관리감독해 온 치밀한 사람답게 자기절제와 품위 유지에 단 한 번의 실수도 허용하지 않은 대단한 인물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한다.
그러나 독자가 이 작품의 중반쯤에 도달하면 이러한 스티븐슨의 자기애(自己愛)는 치열한 자기방어이자 변명이라는 것을 서서히 눈치채게 된다. 스티븐슨이 ‘인류의 안녕에 기여한 위대한 일’이라고 높이 평가한 일들은 실은 말도 안 되게 멍청하고 우둔한 짓이었으며 그가 위대한 인물이라고 치켜세우는 달링턴 경은 세간의 비난과 악평을 듣는 세기의 바보다. 작가는 스티븐슨의 독백과 주변 인물과의 대화를 통하여 스티븐슨의 망상과 실제 상황을 서서히 드러낸다. 스티븐슨이 아무리 자화자찬으로 도배를 해도 현실은 가려지지 않는다. 작가는 스티븐슨이 바라보는 세상과 실체 세상을 함께 드러내는 놀라운 신통력을 발휘한다. 그 절묘한 밸런스란! 또한 그 대조를 통하여 스티븐슨의 우둔함과 위선을 극대화한다. 인물의 위선과 파렴치를 꼬집는 작품은 많았지만 이토록 노련하고 품위 있는 방법으로 인물의 부조리함을 드러낸 작품은 처음이다.
여러분이나 나 같은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이 세상의 중심축에서 우리의 봉사를 받는 저 위대한 신사들의 손에 운명을 맡길 뿐 다른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내 인생이 택했던 길을 두고 왜 이렇게 했던가 못했던가 끙끙대고 속을 태운들 무슨 소용이 잇을까? 여러분이나 나 같은 사람들은 진실되고 가치 있는 일에 작으나마 기여하고자 ‘노력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그리고 누군가 그 야망을 추구하는 데 인생의 많은 부분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결과가 어떻든 그 자체만으로도 긍지와 만족을 느낄 만하다.
301쪽
이렇게라도 자기위안을 해야만 그 삶에 대한 자괴감을 피할 수 있나보다. 보통 어느 작품을 읽고 나면 그래도 주인공에게만은 동정이나 아주 희미한 애정이라도 생기기 마련인데 이 작품은 주인공에게 가차 없다. 일말의 동정도 남기지 않는다. 주인공은 끝까지 이해의 실마리도 남기지 않고 동정의 여지도 남기지 않고 끝까지 본래의 그 가증스럽고 못난 모습을 버리지 못한다. 갱생의 기회도 부여받지 못한다. 그는 조금의 발전이나 변화 없이 아마 그 모습 그대로 생을 마감하리라는 예감을 남긴 채 책장 마지막에서 이별을 고한다.
주인공에게는 어떤 경외감도 들지 않지만 저자에게는 감탄을 멈출 수가 없다. 저자가 전하는 메시지 자체도 너무나 훌륭하지만 그걸 다루는 방법은 훌륭하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하다. 재미나 흥미로서의 소설이 아니라 사람과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고 싶다면 가즈오 이시구로의 모든 소설을 강력 추천. 아, 진짜 이 사람 잘 쓴다.
그는 여기서 말을 멈추고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는 아마추어이며, 오늘날의 국제 정세는 신사 아마추어들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유럽인 여러분들이 이 사실을 빨리 깨달을수록 좋을 겁니다. 점잖고 선량하신 신사 여러분, 제가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을 둘러싼 세계가 어떻게 변해 가고 있는지 혹시 아십니까? 여러분의 그 고상한 직관으로 활약할 수 있었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다만, 여기 유럽인 여러분들이 아직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를 초청해 주신, 선량한 분 같은 신사분들은 스스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문제들에 끼어드는 것을 아직도 업으로 믿고 있습니다. 지난 이틀 동안 이 자리에서 시답잖은 얘기들이 너무나 많이 나왔습니다. 의도는 선량하지만 순진하기 짝이 없는 공론들이었죠. 유럽인 여러분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풀어 가기 위해서는 프로들이 필요합니다.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조만간 재앙으로 치닫게 될 것입니다. 건배합시다, 신사 여러분. 제가 선창하겠습니다. 프로페셔널리즘을 위하여!" 132-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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