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어타운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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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에는 [로스트 인 더스트]라는 제목으로 개봉한 데이빗 맥킨지 감독의 [Hell or Hign Water]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의 배경은 미국 서부, 주인공은 빚더미에 올라 마지막 남은 재산마저 은행에 차압 당하기 일보 직전인 형제 둘이다. 영화를 전개하는 내내, 감독은 꿈이나 희망 같은 것들이 남아 있지 않은 가난한 서부의 거리를 낱낱이 훑어 보여준다. 일자리가 줄어 실업자로 전락한 사람들이 즐비하고 시장성이 없어 도심에는 그 어떤 상점도 더 이상 들어서지 않는다. 거리에 광고판은 비어 있거나 그나마 대출광고가 걸려 있는 게 전부다. 마치 미래라는 것이 통째로 먼지가 되어 햇살 아래 사라져버리는 듯한 풍경에 자본주의라는 덫 속에서 몰락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나 잘 담겨 있다.

 

 [베어타운]의 저자 프레드릭 배크만이 그의 작품 속에서 조명하는 세계도 이와 비슷하다. 어느 변두리, 자본이 바짝 마른 빈곤한 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자본주의 속에서 자본으로부터 소외된 마을 만큼이나 초라하고 건조한 사람들이거나. 둘 다 이거나, 그렇다.
 [베어타운]의 표지가 아이 동화책처럼 서정적이고 예뻐서 나는 잠시 이 작가의 특징을 잊었다. 큰곰자리가 은박으로 수놓인 서늘한 밤을 그린 표지 속에 ‘베어타운’이라는 동화 같은 이름의 마을을 아기자기하게 꾸려가는 사람들이 등장할 것 같다. 하지만 버젓이 책 뒷표지에는 소설 도입부의 두 문장이 인용되어 있다.

 

 “삼월 말의 어느 날 야밤에 한 십대 청소년이 쌍발 산탄총을 들고
숲속으로 들어가 누군가의 이마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이것은 어쩌다 그런 사건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사건은 저것이 전부다. 한 십대 청소년은 우발적으로 총을 들지 않았다. 그는 충분한 시간을 들여 생각했고 숲속을 수시로 탐색하며 자신의 동선을 면밀히 살펴두었다. 그는 모든 것을 각오하고 받아들이고 책임질 생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이 사건이 벌어지기까지, 이 사건에 연루된 모든 사람들의 입장과 처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작가는 500쪽에 이르는 긴 분량을 아낌없이 썼다. 특히 ‘베어타운’이라는 마을의 처지와 상황을 그리는 데에 공을 들였다. 저자가 묘사하는 베어타운의 모습을 머리로 그리는 동안 기이한 체험을 했다. 술에 취한 거인이 눈밭에다 오줌으로 자기 이름을 갈기려던 것처럼 생긴 ‘베어타운’에 데이빗 맥킨지 감독이 [Hell or Hign Water]에서 보여준 후덥지근한 변두리 마을의 모습이 겹치는 것이다. 상점가들이 늘어선 골목의 길이는 매년 짧아지고 일자리 역시 매년 줄어 일거리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일상이, 영화와 책 모두에서 놀랍도록 비슷하다.


 하지만 프레드릭 배크만은 책의 인물들이 은행을 터는 대신 아이스하키에 몰입하도록 했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 흥망성쇠의 키가 되는 아이스하키에 광적으로 매달렸고, 전국대회에 진출한 청소년 아이스하키 선수들은 온 마을 사람들의 꿈을 겹겹이 덧입고 경기에 나갔다. 저자는 아이스하키라는 스포츠를 매개로 선수와 또 다른 선수, 선수와 감독, 그리고 선수의 가족, 구단과 재단 등 다양한 인물과 관계를 섬세하게 그렸다. 이야기 속의 한 감독(다비드)은 하키가 진행되는 경기장과 경기장 밖의 세계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상 경기장 안에서 벌어지는 스포츠의 격렬한 충돌은 경기장 밖의 세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야기 속 몇몇은 사건이 일어난 것이 하키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모든 것은 하키 때문에 벌어진 것처럼 읽힌다. 바로 이 부분에서 이 책의 재미가 있다.

 

 나는 사람의 속성 중 하나가 ‘연대’라고 생각한다. 이 연대성은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고, 공동체를 만든다. 이 연대성이 국가를 만들었고, 이 속성이 최근 이룬 대단한 성과 중 하나로 촛불시위가 있다. 하지만 이 속성은 때로 사람의 눈을 가리우고 양심의 감각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힌다. 연대성에 지나치게 무게를 둔 나머지 나보다 공동체를 더 먼저 생각하자는 인식은 얼핏 고귀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인식이 아름다울 수 있는 영역은 팀의 이익이 개인의 가치와 존재 의미를 훼손하지 않는 선까지다. 연대성에 눈이 멀면 공동체 속 대부분의 개인들은 양심이라는 촛불을 교묘히 끄고 비틀리고 왜곡된 자기최면 속에서 세상을 보게 된다.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다. 현실 속에서 공동체가 개인의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 얼마나 많이 벌어지는가? ‘우리 모두’라는 명분을 칼날처럼 개인의 목에 들이대고 얼마나 많은 상처를 내 왔는가? 얼마나 많은 개인이 사회와 공동체 속에서 명예 살인을 당해왔는가?

 

 프레드릭 배크만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이 참담한 비극을 포착하여 ‘베어타운’으로 옮겼다. 하지만 현실 그대로는 아니다. 상처투성이 결말로 치닫는 게 대부분인 이 현실적 비극은 저자의 필력에 힘을 얻어 희망을 덧입는다. 저자가 빚어낸 지혜롭고 강단 있는 주인공, 그러니까 총을 들고 숲속으로 들어간 한 십대 청소년으로 인하여 이 비극은 가슴 아픈 사건으로 남겨지는 대신 새로운 미래의 시발점으로 승화한다.


 이 지점이야말로 독자들이 프레드릭 배크만의 이야기에 열광하는 부분이 아닌가 한다. 너무나도 현실적인 인물과 사건이 그려져 때로는 고구마 같은 전개에 가슴이 턱턱 막히지만 그들이 빚어내는 이야기의 끝에는 현실을 살아가는 독자 모두가 꿈꾸는 희망과 미래가 있다. 그래서 독자는 그의 작품을 기대하고 기대한 만큼 즐거워하며 읽는 게 아닐까.

 

 [베어타운]의 결말 부분에 저자는 이미 다음 작품의 예고편을 실어둔 것 같다. 사건의 주인공들은 십년 뒤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다시 마주치고 저자는 그들 중 누구는 죽고 누구는 어떠어떠하더라,는 문장 몇 줄을 함께 넣어두었다. 아마 저자의 다음 작품은 이들의 이야기가 아닐는지.
 
 
 

 


우리가 스포츠에 열광하는 이유는 뭘까? 관중석에 앉아 있는 어떤 여자가 스포츠에 열광하는 이유는 그것이 가식 없는 대답을 접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예전에 최정상급 크로스컨트리 선수였다. 스키를 타고 장거리 코스를 달리는 데 십대를 모조리 바쳤다.
349쪽


증오는 매우 자극적인 감정일 수 있다.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친구와 적, 우리와 그들, 선과 악으로 나누면 세상을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고 훨씬 더 무서워할 수 있다. 한 집단을 똘똘 뭉치게 하기에 가장 쉬운 방법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어렵다. 요구사항이 많다. 증오는 간단하다.
그래서 갈등이 벌어지면 우리는 제일 먼저 편을 정한다. 양쪽의 생각을 같이 하는 것보다 그러는 편이 더 쉽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에는 우리의 믿음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찾는다. 평범한 일상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도록 위안이 될 만한 증거를 찾는다. 그런 다음에는 적에게서 인간성을 거세한다. 그러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간단한 방법이 이름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래서 몇 날 밤이 찾아오고 소문이 번지자 베어타운에서는 어느 누구도 휴대전화나 컴퓨터로 ‘마야’라고 쓰지 않고 ‘M’이라고 한다. 아니면 ‘그 아이’라고 한다. 아니면 ‘그 걸레’라고 한다.
3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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