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중국경기행
7월 초 10여일에 걸쳐서 북한과 중국 국경을 기행하였다.훈춘에서 출발하여 도문, 연변 등을 거쳐서 두만강을 따라서 백두산으로, 그리고 백두산에서 단동까지는 고구려 유적을 보기위하여 집안으로 경유하여 이동을 하였다. 북중국경의 옥수수밭의 바다이다. 넓은 들판에도 가파픈 산위에도 도시의 길가 사이에도 푸르른 옥수수밭이고, 옥수수밭 사이사이에 마을과 도시과 보이고, 깡마른 사람들이 산다.
-구호
훈춘-도문-연길
훈춘의 동쪽에서 한중일 삼국의 국경이 시작된다. 중국측의 방천이라는 마을에 오르면 세 나라를 모두 볼수 있다고 하자만, 아침부터 내리는 여름 장대비가 좀처럼 쉬지않는다. 운전기사의 판단에 따라 방천으로 가는 것은 포기하고 서쪽으로 향하였다. 훈춘에서 도문에 이르는 두만강변 주변에서 끊어진 다리들이 많다. 백두산에 시작하여 동쪽으로 흐르는 두만강의 하류라서 강폭이 넓다. 장마철의 두만강 하류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수영하서 건너기에는 충분할 듯 해보인다.
끊어진 다리 넘어의 북한은 온통 옥수수밭이다. 두만강을 두고 양쪽에 제방이 높이 쌓여있어서 중국측의 제방을 내려와서 북한의 제방 때문에 그 이상은 보이지 않는다. 삼삼오오 모여있는 북한사람과 드문드문 마른 황소들이 보인다. 7월의 푸르름으로 인하여 깡마른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면 한국의 여느 농촌의 한가함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도문의 조중국경 검문소에 들렀다. 중국측에는 국경경비대의 건물 하나의 감시탑을 입장료를 받고 개방한다. 조선족 안내인들이 도문맞은편의 북한 마을을 설명해 주는데 선전용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연길에 도착해서 용정으로 이동했다. 연변조선족자치구는 항일운동유적지과 구 일본군 침략시설이 서로 산재된 공간이다. 연변조선족자치구를 여러 곳을 둘러보아도 한반도의 어느 마을과 다를 바가 없다. 조선말기의 국정혼란을 등에 지고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은 조선인들이 찾은 땅은 벼농사 짓기에 좋은 조선과 같은 땅이다. 불과 몇 십킬로를 북진했는데도 불과하고 벼농사는 그리 쉽게 되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서 추운 남간도지방에 적합한 쌀을 개발한 것이 조선인들이라고 한다. 그들은 조선과 같은 땅이 지천에 널러있고 벼농사까지 가능하고, 오랑캐라고 믿었던 종족들이 벼농사를 배우기 위하여 모시니 사농공상이 있는 개혁개방이 더딘 조선보다 마음편하지 않았을까.
용정은 문익환목사, 윤동주 시인등 민족의 지도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마을을 가는 길에는 한국식 토종닭집이 즐비한데 맛이 일품이다. 시골마을에 번듯한 식당들은 시골의 빈곤한 조선족들이 한국에서 불법체류하여 돈을 벌어서 지은 식당들이라고 한다.
연길 - 화룡 - 나평진 - 두만강(북한의 무산시앞의 숭선진과 김일성낚시터 경유)
백두산
자연풍광 묘사중.
백두산정상에서는 조선족의 터새가 대단했다. 백두산을 지키는 민족적 자부심도 그렇지만, 몇 천명의 조선족들이 중국정부에 내는 비공식적인 세금(뇌물)도 만만치 않단다. 그러나 이런 조선족의 위세도 이제는 볼수가 없을 것이다. 중국길림성정부가 직접관리할 예정이라고 한다. 조선족은 중국의 5대 관리 소수민족일 정도 중국정부에게는 반항적인 민족이다. 그래서 민족정기를 상징하는 백두산을 무한정 조선족에게 관리하게 할수도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 우익한국인들이 조선족에게 민족의식(?)을 이야기하고 다녀, 중국정부가 상당히 불쾌하다고 한다. 즉 중국정부의 위기 의식을 자극한다고 한다.
백두산내의 모든 물가는 한국에 거의 육박한다. 단순비교해도 2004년도 한국과 중국의 1인당 GNP는 15배정도이고, 연변지역과 같은 시골의 물가는 정말 15배가의 격차가 난다. 이런곳에 대량소비를 하는 한국인 몇 십만명이 떨어뜨는 외화는 조선족 호주머니에 고스란히 넣는 것을 중국입장에서는 할 수가 없으리라.
심양 – 칠보산 호텔
북경내에 북한 식당이 많이 있고, 심지어 왕징신청안에서는 대성산관이라는 북한 무역회사에 운영하는 웨스턴 바까지 있다. 북경의 대성산관은 스코치위스키, 맥주뿐 만 아니라 북한의 들쭉술, 구렁이가 담긴 구렁이주까지 다양한 식사류와 주류를 제공한다.
심양의 번화가에 유치한 칠보산 호텔은 다른 북한 무역회사에는 운영하는 식당과 같이 한국관광객이 대부분이다. 로비에서 쉬고 있는 맞은편의 건장한 남자 두 명이서 심각한 표정으로 귀속말을 하고 있었다. 무역일꾼들과 달리 몸이 마르지도 않았고, 가슴에 김정일휘장(뱃지)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군인같아 보였다. 평양에서 왔냐고 묻자, 평양에서 왔다고 한다. 그리고 인상이 한국의 특수부대 군인같다고 하자, 군인아니니까 안심하시라요라고 한다. 그럼 무역일꾼입니까라고 묻자, 대답을 주저한다.
중국의 4성급 다른 호텔들과 별반 다른 것도 없고, 다른 호텔처럼 몇 차례 마사지받을 거냐는 중국아가씨들의 전화를 받았다. 7월 9일 새벽 2시경에 호텔이 정전이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식당에서 한국사람들이 농담으로 조국(북한)이 전력난이 심하니 외국나와도 태를 낸다고 농담을 해대었다. 식당에서는 상당히 많은 북한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고, 여유로운 모습을 볼수가 없었다.내가 여류롭게 북한 사람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본 것은 단동의 압록강 공원앞의 평양식당밖에 없었다. 한국관광객의 항의로 호텔비용을 받지 않았다.
호산장성-덕적도
단동은 신의주를 마주보고 있는 가파르게 발전하고 있는 도시이다. 호산장성은 단동에서 30km정도 동쪽에 위치한 했고, 중국측의 역사왜곡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만리장성의 일부라고 주장하고 있다. 호산장성의 입구의 오른편에서는 옥수수나 과일을 파는 조그많게 행상을 하는 많은데, 그 길을 따라 500m를 가면 조금 나룻배들이 있다. 중국 국경수비대의 ‘국경촬영금지, 촬영시 엄벌함, 월경금지’ 등의 문구와 한국어로 ‘북한국경을 넘는 투어’라는 상반된 나룻배 상인들의 표지판이 나란히 있다.
배에 오르려고 하자 담배를 파는 연인이 담배를 사가야 한단다. 북한에서는 담배가 화폐가치를 하므로 군인들에게 담배를 던져주어야만이 사진촬영을 허용한다고 한다. 나룻배에 오르자 해방군의 초급군이 동승했다. 그리고 몇 분후 산성기슳에 내렸다.
호산장성의 바로 맞으편 몇 미터 앞은 북한 우적도이다. 우리 배가 북측에 접근하자 건장한 자전거를 탄 청년이 배를 따라 오기 시작하였다. 얼굴이 하얗고 체격이 좋았으면 안경도 상당히 고급스러워보였고, 복장 역시 아주 고급스러워보였다. 사공이 배를 좀 더 빨리 자전거를 더 이상 따라 오지 못했다.
몇 십미터는 서쪽으로 이동하자 조선인민군 복장을 한 군인이 우리 서쪽으로 가르쳤다. 그의 복장은 깔끔해 보였는데 건장한 체력에 군복이 풀어지고 모자를 거꾸로 쓰고 있어서, 한국의 말년 병장을 연상하게 하였다. 지정한 장소를 따라서 사공이 배를 몇 백미터 이동하자, 사람 키보다 큰 옥수수밭 사이에서 옹색한 차림의 중년 아줌마가 나왔다. 사공을 담배를 던지라고 하자, 반사적으로 담배를 던졌다. 잠시후 말년 병장 같은 군인이 우리에게 손을 흔들고는 옥수수밭사이로 담배를 찾기 위하여 들어갔다.
숨을 헐떡거리며 쫓아온 자전거를 타고 온 건장한 청년이 우리를 향하여 삿대질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일에 익숙한 듯 배사공을 내 사진을 빼앗서 그를 찍었다. 청년의 항의가 더욱 거세지자 뱃사공은 어디서 배웠는데, ‘감자나 먹어라’라는 삿대질을 북한 청년에게 하면서 한국어로 똑같이 욕을 했다. 잠시동안의 옥수수밭의 해프닝이었지만, 북한 내부를 볼수가 있었다.
음식을 던져주면 먹으면 끝나지만, 담배는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가 있으므로 북한 군인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품목이라고 한다. 군기가 헤이해진 북한 국경경비대의 모습과 그들을 감시하는 사람(?)들이 다중적 감시체계의 단면을 볼수가 있었다. 뱃사공은 한족으로 한국말을 조금 구사하였고, 배사공은 1인당 10원(1300원)을 요구하였고, 매일매일 상당수의 한국관광객이 밀려와서 수입이 상당하다고 자랑을 하였다.
신의주-단동
단동에 외국인이 넘쳐대는 것은 브루스 커밍스식 표현을 조금 가공하면 ‘포스트 모던의 은자의 왕국(Hermit Kingdom of Post-modern)’을 지켜보기 위해서 이다. 단동시내에서 신의주를 지켜볼수 있는 공간은 많다. 압록강공원, 항미원조전쟁기념관(한국전쟁기념관), 압록강변을 따라 즐비한 고층 아파트, 그리고 산 공원 등이다.
압록강공원 앞에는 모터 보트나 단체관광객용 대형 선박을 이용하여 신의주앞까지 갈수가있다. 압록강공원에 중국인들은 무더위에 수영을 하면서 사실상 북한 영토인 ‘위화도’까지 왔다갔다한다. 모터 보트를 타자 압록강 철교를 따라서 신의주앞까지 이동하였다. 신의주앞이라기 보다는 이미 손만 뻗히면 북한 땅이 만져지고, 북한 배들이 만져지고, 북한 사람들과 이야기가 가능한 공간이다.
철교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느리게 이동하였다. 먼저 짓다가 중단한 아파트나 별장 같은 허물한 건물들이 보이고 그 앞에서 수영을 하고 부유해 보이는 북한 남자들이 몇 수십명이 있다. 그리고 북측 압록강 공원에는 한국의 수학여행단 같은 풍경의 사람들이 여유롭게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신의주 항구에는 중소형 선박을 건조하는 소형 조선소 등이 있고, 끊임없는 군인들이 이동하는 모습이 모인다. 압록강에서 낚시를 하는 어부들은 모두 배를 정박해두고 배위에서 놀고 있는 모습이다. 비록 체격이 마르기는 했지만, 우리과 흡사한 모습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식량난을 겪고 있는 모습은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중국측 안내인은 외국인을 위한 전시용이라고 했지만, 몇 백 명정도의 인민을 동원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밤이 되자 압록강 공원주변에 조선자기, 북한화폐 등등의 북한 물건을 파는 잡상인들이 들어났다. 도자기 등의 경우는 진품여부를 알 수 없었으나, 북한 군인들의 기념패, 훈장, 화폐, 우표 등등은 상당량이 거래되었다. 선군정치를 하는 북한에서 군인들의 명예를 상징하는 물품들이 외국 시장에서 싼 값에 거래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밤이 되자 신의주 중심부가 여전히 밝아보였다. 하도 신기하여 조선족들에게 물어보자 시내중심의 김일성 동상만은 전력난에도 불을 밝히기 때문에 환하단다.
단동시내 역시 북한 식당이 있고, 압록강 공원 주변에는 북한 무역회사도 꽤나 있어서 김일성휘장(빼지)를 오른쪽 가슴에 단 북한인들이 거리를 걷는 모습도 보였다. 북한 식당은 바다고기, 민물고기 등의 여러 종류가 많았고, 상어회, 랍스터 회 등 한국이나 중국대도시에는 비싼 값에 팔리는 생선회가 저렴했다.
2005년 7월
대련
러시아와 일본의 조차지로서 영향이 강하게 남았있고, 중러간에 군항에 대한 조차권 조약이 있었다.
현재로 일본의 투자가 많이 많아있어, 일본인등 외국인이도 많다.
한국과는대인페리에서 국제선도 잘 발달되어있고, 중국국내항구는 천진상해, 산동의 과는 불관 2시간 30분. 인천과는 주 3회 선박을 운항
대련항의 국제부두는 시설이 미비하여 많은 수화물을 직접 들고 다녀야 하며 배안에서의 이동도 불편하다.
인천-대련간의 배는 비교적 작아서 좀 흔들리는데, 내가 여행하던 날은 특히 바다가 흔들렸다.
대련은 동북지방에서 몇 안되는 한족이 역사적으로 거주하던 공간이다. 특히 이홍장시대에 이르던 산동의 한족들이 이주하여, 지난 150년 동안 한족화된 지역이다. 언어역시 산동북부지역의 말씨를 많이 쓴다.
대련시내의 해변은 아름답고, 특히 라오후공원과 싱하이공원사이의 동북해변에서 보는 섬이 떠있는 발해만은 아름답다.
이 해변에는 아주 작은 봉추도섬이 있고, 그 앞에는 봉추도 빈관이라는 호텔이 있는데, 등소평이 기차를 타고 와서 휴양하던 곳으로 김일성역시 휴양지로 사용했고, 북중간의 최고지도자간의 비밀정상회담의 장소이다.
지금도 중국 최고지도자의 휴양지도 입장료 15원을 내고 들어가면 호텔외곽만 구경하고, 내부는 경비원들이 구경시켜주지 않는다. 그리고 봉추도 섬은 여행사에서 30-40원에 배로 주변을 둘러보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실제로 운영되는지는 의문이다.
대련은 너무 아름답고 깨끗한 지역이다. 마치 20년전의 한국을 보는 그런 기분이다. 그러나 특색없는 서구화된 도시로 그다지 매력적이지는 못했다. 대련내의 거대한 공원은 크다는 것외는 그대지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 현대화된 도시, 싱하이 공원은 유덕화의 별장이 있어서 좀 휴양하기에 좋다는 느낌이 든다. 특히 대련의 야경은 일품이다.
여순군항
대련, 여순은 한국병탄과정의 가장 중요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격전지로
동북아시아 해영패권을 좌우했던 공간이다.
여순은 지금 중국이 관리하는 해군항으로, 여전히 외국인에게 개방되어 있지 않지만,
중국인과 섞여 여행이 가능한 지역이다.
여순항은 일반적으로 50원인데 나를 여행사에 소개한 조선족이 80원을 요구했다. 그리고 출발시간이 되어서는 100원을 요구했다. 괘씸했지만, 외국인출입금지 구역이라서 그냥 참았다.
먼저 박물관같은 곳을 갔는데, 위해의 청일전쟁박물관에 비하여 아무것도 없고, 입장료만 받는다.
그리고 여순의 중심부에 위치한 산에 올라가서 여순을 조망하는데, 외국인이라고 5분만 보라고 한다.
여행사는 발각되면 나와 여행사가 물어야할 벌금이 적지않고, 최악의 경우에는 스파이 혐의로 추방된다고 한다. 좀 우습기는 했지만, 나 역시도 좀 졸렸다. 그래도 5분사이에 군함과 항구입구를 촬영했다.
여순항은 입구가 적은 천혜의 요새다. 군항내의 오른쪽으로 건조중인 구축함이 여러 척이 있는데
최신 한국형 구축함과 크기는 비슷했다. 그리고 항내에 수리중에 10여척의 크고작은 구축함이 있고,
소형 군함등도 많이 있었다.
항구주변은 해군시설로 가득했고, 대련에서 단동에 이르는 모든 지역은 레이다 부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극동미군, 한국군, 일본군만이 아니라 특히 북한군의 동향을 포착하려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군항주변의 거리는 스탈린가가 있는데, 모택동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부리던 스탈린에게서 여순항을 반환받기 위해 지혜롭게 혹은 굴욕적으로 소련과 협상했음을 할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소련 열사능, 구관동군 사령부 등이 소련,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잔재가 강하게 남아있고,
여순항의 모습은 흥미로웠다.
여행사에서 강제로 쇼핑하는 곳을 몇 군데 갔는데, 악어마른 고기, 뱀가족 지갑, 러시아 우표 등 특이한 물건들이 많았다. 그리고 악아쇼를 보러갔는데, 트렌스 젠더들이 거의 나체로 춤을 추고, 남자들 무릅위에서 음란한 동작과 춤을 추는데 모두 거부감을 느껴다. 너무도 자본화된 중국의 퇴폐적인 일면을 볼수 있어서 즐거웠다. 그리고 같이 사진을 찍은 후에 상당량을 돈을 요구했다.
2006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