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2월 한국에 돌아왔다. 그때는 호주에서 너무 지쳐있어 다시 외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다. 사실 호주에서 대학을 포기하고 한국에 돌아온 것은 순전히 대학 1, 2학년때 선술집의 검게 탄 연탄 삼겹살의 소주를 기울이며 나누던 정이 그리워서였다. 그런데 군대와 호주 유학을 통하여 학교에는 사실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참 내가 잘 해주었던 후배들도 인사만 하고는 어디로 사라졌다. 참 변했다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내가 변했었을 수도 있겠지. 줄곧 일본어와 정치학만을 공부하며 3월을 맞이했다. 3월의 캠퍼스는 나에게 너무도 잔인했다. 전혀 적응할 수가 없었다. 원래 성격이 무지막지하게 명랑한 내가 적응 못하면, 그때는 내 잘못을 아니었겠지. 어쨌든 그래서 학교 생활을 포기하고, 내 공부만 했다. 그리고 LG선발대 광고를 보고 준비했다. LG21세기선발대는 나에게 수많은 방법론을 가르쳐 주었다. 사실 나는 원격교육에 대하여 지식이 전무했다. 그러나 내가 가상하는 미래와 원격교육은 연관성이 있어 보였다. 그래서 '무'에서 나름대로의 영역을 창조했다. 물론 람보처럼 이런저런 전문가를 찾아가서 물어보았다. 1997년 만해도 우리 나라에서 원격교육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쉽지는 않았다. 자료는 주로 내 머리 안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인터넷으로 수집하기 시작했다. 처음 작업은 거의 밤새기가 일수였다. 처음으로 인간적인 한계를 느껴다. 학교 생활과 또 하나의 분야를 공부하는 것은 거의 초인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 알게된 교수님, 사업하는 분, 전문가 등을 직접 면접하고 나서는 기본적인 개념이 바꾸었다. 그래서 또 처음부터 인터넷 작업을 시작했다. 그 분들이 주신 책들은 거의 모두 영문밖에 없어서 그것마저도 쉽지는 않았다. 어쨌든 졸작이지만, 완성되고 같이 준비하던 다른 팀들과 술도 마셨다. 참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준비해서 놀랐다. 무슨 조그만 역사를 이룩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처음으로 배웠다. 나의 재능과 정열을 모두 마쳐도 만족할만한 결과는 얻을 수 없었다. 2차 면접은 면접관들의 면면을 파악하려고 준비했다. 그리고 예상 질문을 몇 가지 영역에 나눠 준비했다. 아마도 몇 백 문제 정도의 전문분야의 문제를 외우려고 노력했다. 우리 팀은 모두 영어로 면접을 진행했다. 면접은 일반적으로 10분 정도보다 약간 긴데, 모두 덜덜 떨고 있었다. 다른 팀들도 태연한 척 영어로 이야기하거나, 오락게임 등을 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우리 팀이 면접실에 들어가자마자 한 분이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5분합시다 라고 제의했다. 그러나 면접관들이 주제에 흥미를 느꼈는지, 많은 질문을 하셨고 2005년의 한국 문화가 인터넷을 통한 국제화 시대에 생존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우리들과 약간의 의견이 어긋난다. 그래서 면접은 20분을 넘기고, 면접관들이 너무도 당당한 우리 팀에게 웃어주셨다. 그러나 정작 미국과 캐나다의 탐방은 준비가 소홀했다. 너무나 바빴다. 다른 회사에서 유럽을 보내주어 거기까지 갔다오느라고 정말 부끄럽게 준비를 했다. 미국에서 좋은 호텔과 렌트카, 음식을 먹으며, 최상의 관련 시설을 견학하고 미국 교수님들과 이야기 할 수 있었다. 나와는 멀리만 느껴지는 그런 사람들이 무척 가깝다는 느낌도 들었다. 방송국의 동행 취재는 내가 무슨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어째든 나의 영역을 무진장 확장해 주었다. 뭐 날까 나는 항상 머리가 나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머리보다는 열정이 가능성을 만든다는 나름대로의 철학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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