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의 첫 시간은 한국의 삼일운동에 대한 내용이었다. 한국의 중학교 교과서에 대한 논쟁이었다. 쟁점은 일본 군인과 경찰의 무자비한 유관순을 위시한 여학생 살인과 희롱 등에 대한 미국 선교사들의 증언이었다. 한국을 공부하는 학생은 전쟁시에도 인권 유린을 문제로 삼아 군국주의하의 일본 정부를 비난했고, 한국 학생은 삼일운동은 인도 간디의 비무장 운동과 같은 맥락의 비무장 운동에 대한 살인을 문제과 1919년의 상황은 전쟁 상황이 아닌 영국의 아일랜드 침략시의 평화와 같다는 문제를 주장했다. 일본의 많은 학생은 잔혹한 전쟁 상황을 교과서에 싣는 한국 문교부의 역사 정책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나의 반론은 일본의 보수 정치인의 세계 대전을 일으킨 장본인들의 후손들이 일본을 이끌어가고, 전범들이 묻혀 있는 야스쿠니 신사(神社)에 참배, 어업 협정 등에서 대화보다는 국력을 앞세운 일방적인 협정 파기, 조선 침략에 대한 정치인들의 미화 연설 등이 끝나지 않으면, 한국 문교부의 정책은 일본에 두려움을 계속 가르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에서 경제학을 공부 학생의 주장은 식민지들의 경제 발전을 주목한다. 그리고 싱가포르, 타이완 등의 학생들도 세계 대전중의 군국주의 일본 정부의 공헌도를 인정한다. 국토의 인프라를 건설하고,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하고, 교육을 대중화한 것에 대하여 감사한다. 물론 그들이 문제 삼는 것은 수탈을 위한 개발이었다는 것이다. 일본 학생들은 왜 한국 사람들만이 식민지 상황에서의 약탈과 살인을 문제 삼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일본의 경부철도, 전기, 제국대학설립(서울대학교) 등의 강조한다. 한국의 반론은 신사참배에 거부한 학교의 폐교, 민족 대학에 대한 좌절등 많은 반론이 있다. 그리고 인프라의 문제도 한국의 풍수지리에 대한 기(氣) 말살 정책, 조선의 궁전, 성곽 등 인프라의 조직적인 파괴를 문제삼는다. 문제는 이것이다. 문화, 근대화, 서구화.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홋카이도, 타이완, 오키나와 등은 독자적인 문화가 있지 않았다. 말레이시아는 유럽의 많은 제국주의 국가에 침략을 장기간 받아 문명의 단일성이 적었고, 그에 따른 저항도 적었다. 나는 여기서 역사에 대한 논쟁을 하고 싶지는 않다. 한국과 일본 나름대로의 국가 전략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반목은 해결책은 없는가. 1923년에 경남 사천의 순사의 아들로 태어난 사사키 의 주장은 역사 공유다. 그의 아버지의 친구들 평양 경찰서 서장은 한국인을 너무 괴롭혀 일본의 항복 후 곧바로 총살당했단다. 그리고 한국의 역사교과서는 40여 페이지인데, 일본은 1페이지가 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문제삼고, 한일 역사 학자간의 역사 공유 모임에 찬사를 보내고, 역사교과서 공유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한다. 그러나 그도 역시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한 문제 해결보다는 '日韓倂合'에 대한 고민한다. 일본의 좌파 학생들의 조선침략에 대한 사과 요구에 대한 데모에서 불과 수십명만이 참가한다. 그리고 한국 정부는 그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지도 교수는 학생들에게 위안부 문제를 고민하라고 호통친다. 그리고 한국 침략에 대한 사료를 읽고 반성할 것을 강조한다. 많은 한국인들은 일본 지식인들의 진솔한 역사 인식에 대하여 감동하고, 존경한다. 그러나 나치를 부정하는 독일인들은 한국인에게 묻는다. 일본 지식인들의 공식적인 입장과 학문적인 입장을 차이를 생각해 보았는가. 그리고 지식인들의 한국인에 대한 개인적인 사과가 아닌 공식적인 사과를 보았는가. 김대중 대통령의 일본 방문시 天皇의 사과에 대하여 일본들은 사회당 정권의 사과 이후 왜 사과가 필요한지에 대하여 불평을 한다. 입장을 바꾸워 생각하자고 말한다. 젊은 세대들은 역사에서 자유롭고, 일본 정치인들은 전시에 정치인 가문의 후예들이다. 독일인들은 유럽, 유태인 등에게 개인적으로 역사 문제에 대하여 미안한 마음으로 출발한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달한 날,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에 대하여 축제를 하고, 중남미에서는 살인과 강간에 대한 전범, 콜럼버스를 화형하고, 독립을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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