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정권 탄생의 진실 - 기밀 해제된 구(舊)소련 공산당 정치국 사료로 본
시모토마이 노부오 지음, 이혁재 옮김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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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아시아 냉전의 시작

동아시아 냉전사

세계체제로서의 냉전과 동아시아에서의 냉전를 구분하여 이해하는데 설득력

45년 2월의 유동적 동아시아체제를 규정한 얄타 체제를 실패로 규정

동아시아의 분단국과 영토모순 베트남, 몽고, 중국, 한국 등의 분단

냉전의 주요쟁점: 이데올로기, 지정학, 핵무기

냉전연구의 전통주의든 수정주의든 미국자료에 의존, 그러나 지금은 냉전은 1/4을 차지했던구소련의 해제문건을 활용하는 것이 가능

 

2장 중국혁명과 중소동맹

스탈린의 동아시아 구상

진주만 기습이후 일본패배(41.12)를 예상하고, 전후질서 구상

이데올로기보다 지정학적 이익을 우선시

 

이데올로기와 지정학적 이익의 충돌

스탈린의 지정학적 팽창요구는 우라늄확보 목적도 있었고, 핵개발에 따른 아사자 급증

(소련 46-47년 100만-200만, 중국 대약진정책 2천만-3천만, 북한 90년대)

모택동의 중국혁명은 얄타체제와 중소우호조약에 기반한 스탈린의 지정학적 이익을 침해, 스탈린은 모택동의 회담이나 지원을 실현하기 어려운 입장

- 최신연구: 스탈린은 모택동와 장제스 지원도 하지 못했다(선택불능)

 

소련공산당과 중국공산당의 관계, 코민테른

1920년대이후, 코민테른의 하부조직으로 각국 공산당, 하지만 코민테른은 소련의 외국공산당 통제 기구화, 1930년이후는 소련의 국경경비대, 스탈린 외교의 외부 조직화

미영동맹을 강화하고, 전쟁수행을 위하여, 1943년 5월 코민테른 해산→소련공산당 국제정부 신설(10월) →중앙위원회 국제부로 개칭(12월)

전후, 일국사회주의라는 고립노선에서 탈피

코민포름창설(47년 9월)

-51년 1월, 각국 지도자를 불러 53년 말까지 전쟁준비를 지시→냉전으로 불능

옌안의 모택동과는 충고정도, 중국동북부 공산당과 중국 동북부 소련군은 항시적  연락

 

▲중국내전과 중국 동북부

소련점령정권과 동북 공산당과 밀착

소련제공의 무기 등은 동북내전승리의 발판

 

만주혁명근거지설: 중국혁명에서 옌안의 모택동 중심과 동북의 린비아오, 가오강 주도에 대한 것은 논쟁적이다.

 

중소동맹은 중국입장에서는 자립을 위한 동맹으로 중소분쟁은 내재적이었고, 아시아 혁명의 중심지로서 소련을 중국을 인정. 소련에게 동유럽이라는 소련의 위성국과 공산주의 대국 중국은 달랐다.

 

3장 북한-건국, 전쟁, 자주

소련의 괴뢰정권 북한의 탄생 지정학적 목적, 우발적 결과

+중소 공동의 전쟁

56년 위기이후 김일성 독재체제의 확립

 

4장 소련과 아시아, 위장동맹(54-64)

세계내전후, 동아시아는 내전과 혁명, 한국전쟁 등 대정치의 시대

유럽과 동아시아 냉전은 1. 대칭적 구조 vs 비대칭적 구조, 2. 2극지배 vs 다극구조

                    그리고 소련과 동아시아 동맹의 불균형성 상호오해와 불신

 

 ▲스탈린 사후, 동맹의 재정의

소련, 뤼순, 다롄에서 소련군 철수를 관철, 55년 5월 ⇒ 중소불평등해소, 대일관계개선 메시지

몽고분단문제는 여전히 미해결

▲스탈린 격하를 둘러싼 중소가 불협화음 → 헝가리 사태 등 동유럽문제를 둘러싼 중소의 신경전

핵문제를 둘러싼 동맹위기 – 군사문제를 둘러싼 모택동과 흐루시초프의 개인적 차원이 대립이 양국의 전쟁과 평화대한 시각까지도 큰 차이 – 1950년 모택동의 독자성이 확대  

▲모택동의 중국 확정되지 않는 영토(티베트, 대만 등)를 둘러싼 미중대립에 흐루시초프는 평화적 방법을 강구하며 대립→.64년 흐루시초프 실각때즈음 중국핵실험성공과 문혁시의 중소무력 충돌

▲49년 1월 미코얀과 모택동의 몽고통일을 위한 논의  - 중소의 제국주의적 지정학적 관점에 결렬

▲북소간의 우호조약은 신뢰가 없었고, 흐루시초프는 케네디정권과 평화공존이 달성되면 조약의 무효화를 김일성에 설명하면서 조약에 조인

 

5장 중소냉전과 아시아 냉전(1964-1984)

 

▲2중 냉전구도

64년 8월 통킹만 사건, 10월 브레즈네프가 제 1서기.

 아시아주의자 코시킨총리는 대중관계 개선에 적극적. 안드로포프 서기는 모택동의 이중전략을 우려하면, 중미관계 개선를 통한 소련 위협을 우려.

11월 혁명기념일, 주은래는 소련을 방문하여 흐루시초프 노선을 비판, 개정요구 소련 마리노프스키 국방장관은 주은래에게 소련이 흐루시초프를 처분했기 때문에 중국은 모택동을 제거하라고 요구, 주은래는 곧바로 귀국. 긴장완화의 실패.

베트남, 몽고 문제를 둘러싸고 중소대립은 격화되고, 일본공산당과 중소간 대립하여, 아시아 공산주의 운동은 완전 붕괴.

▲중소냉전에서 등소평, 유소기등의 소련과의 관계 개선을 요구하는 실권파와 모택동은 투쟁의 수단으로 문혁을 발동. 문혁으로 중국외교의 고립화라는 악순환.

문혁의 국내정치와 국제정치의 연계성.

▲베트남전쟁: 소련권으로

소련의 양해하에 팔로군내 일본병사들이 베트남 지원→ 49년 중소합의에 따라 베트남 안보는 중국이 담당 “세계혁명은 총사령관 스탈린, 아시아 혁명의 총사령과 모택동”→54년 제네바합의이후 베트남의 중국 불신 시작 → 북폭과 시작된 이후 베트남 지도자들의 중국 불신강화

→문혁시 모택동은 베트남과 북한의 소련권 편입에 대하여 무관심 →

베트남의 자체적인 혁명과 통일 성공→ 중국내 반베트남 감정의 격앙→1979년 등소평의 베트남 응징발언과 중월전쟁→1979년 2월 17일, 중국인민해방군의 참패, 18일 소련은  ‘베트남 소련 동맹준수’라른 성명을 발표하며, 군을 극동으로 이동시켜 베트남을 지원했고, 몽고에 파견된 소련 전차부대도 시위활동에 동원되었다.

▲1969년 3월 100만명의 군인이 동원된 중소국경분쟁, 1971년 9월 린뱌오 추락사건으로 중소갈등의 심화

▲중국의 국내외적 위기를 중미, 중일 화해를 통하여 돌파, 소련의 2개의 전선 구축에 따른위기감 심화와 소련의 유럽, 일본 접근

▲1979년 모택동 사망이후 중소접근을 모색

▲소련의 아프카니스탄 침공의 신냉전

 

6장 소련 붕괴와 아시아

▲ 1985년 3월 고르바초프 서기장 취임

신사고 논쟁, 군사보다 정치를 통한 안전보장 추구, 핵실험 중지 움직임, 중국과 관계개선

▲1985년 체르넨코서기장 장례식에 참석한 이붕은 소련을 처음으로 사회주의 국가로 인정

등소평은 중소관계 개선 움직임에 3대장애를 거론 ‘캄보디아의 베트마국, 중국, 몽고국경국의 소련군, 아프카니스탄의 소련군’ →고르바초프 중국, 동유럽 담당자 교체 → 1986년 블라디보스토크 선언에서 고르비는 중국을 중요한 대국으로 인지→1988년-89년 3대 문제의 철군 시작→89년 5월 고르비 베이징 방문, 천안문 사태→94년 9월 강택민의 모스크바 방문에서 국경선문제를 해결하고, 중소냉전의 해소

→2001년 중러선린우호협력조약, 1996년 4월 상하이 5

 

7장 21세기의 아시아 : 결론

1.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는 냉전의 출발점부터 균형을 잡을 것인가라는 문제가 있다. (세력균형)

현대러시아외교는 전방위, 동아시아 중시 외교, 그러나 역사적으로 소련과 아시아는 연결고리가 없다.

모택동과 스탈린은 공산당보다는 군사첩보적 연대. 이념의 일체성은 처음부터 없었다.

2. 지정학이란 측면에서는 유라시아의 동서 국가들을 어떻게

3. 동아시아의 핵문제. 핵확산.

 

코멘트

저자는 현실주의관점에서 동아시아 공산주의 연대를 이데올로기없는 지정학적 동맹으로 파악하고, 21세기에는 지경학적 관점에서 유사동맹형태를 띠고 있다고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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