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苏友好同盟条约(195024) 中国国际问题研究所编 、『论和平共处五项原则-纪念和平共处五项原则诞生50周年』、(世界知识出版社2004年)、329 

시효 발생시기는 4월 11일부터이며 시효기간은 30년이다. 조약은 일본(또는 그 동맹국) 제국주의의 침략을 공동으로 저지하고, 세계평화를 보위하기 위한 정치군사연맹 결성, 그리고 양국의 경제·문화관계의 발전과 확고한 토대를 위한 상호 지원 등에 관해 규정하고 있다. 또한 중국에 대한 소련의 3억 달러의 차관제공 및 기계설비와 기재를 소련으로부터 구입한다는 내용이 조인되었다. '중국 창춘[長春] 철도와 뤼순 항[旅順港] 및 다롄 항[大連港]에 관한 협정'도 조인되었다. 이 협정에 근거하여 소련은 다롄 항에서 그동안 조차하여 대신 관리했던 재산과 중·소가 공동관리하던 창춘 철도를 1952년에 무상으로 중국에게 이양했다. 1955년 소련군은 뤼순 항에서 철수했고 전체 설비를 중국에게 무상으로 이양했다. 1979년 4월 3일 제5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7차 전체회의에서 기간이 만료된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을 더이상 연장하지 않는다'는 결의가 통과되었다. 같은 날 외교부장 황화[黃華]는 소련대사와의 회견을 통해 중국의 이와 같은 입장을 소련측에 통보해줄 것을 결정했다. 아울러 중·소 간에 원칙상 차이가 있는 상호 주권과 영토의 존중, 상호불가침, 상호 내정불간섭, 상호 이익과 평등, 평화공존 등의 5개항 원칙을 토대로 서로 방해받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의 중국측 입장을 다시 소련측에 통보해줄 것을 결의했다. 또한 정상적인 국가관계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쌍방간의 현안문제와 아직 결정되지 않은 문제의 즉각적인 해결, 양국관계의 개선을 위한 담판의 개최를 건의했다.

中蘇友好同盟條約

Sino-Soviet Treaty of Friendship and Alliance

1945년 8월 14일 중화민국 정부와 소련 정부가 모스크바에서 조인한 조약.

양측의 군사동맹, 상대방의 주권과 영토를 서로 존중할 것, 전쟁 후 공동으로 모든 조치를 취하여 일본이 다시 침략을 하거나 평화를 파괴할 수 없도록 할 것 등이 명시되어 있다. 소련 정부는 중국에 도의적·물질적 원조를 제공하며, 소련측이 중국의 다롄 항[大連港]과 뤼순 항[旅順港]의 해군기지를 사용하고, 중국의 창춘[長春] 철도를 공동으로 경영한다는 데 동의했다. 중화민국 정부는 외몽골의 독립과 자치를 승인했다. 그러나 소련측이 거듭 조약을 위반했으므로 중화민국정부는 1949년 9월 국제연합(UN) 총회에 소련 탄핵안을 제출했다. 1952년 2월 1일 UN 총회에서 투표한 결과 2/3가 찬성하여 이 안이 통과되었다. 1953년 2월 25일 이 조약의 폐지가 선포되었다.

 

 

네프 = 신경제정책

 

소련이 1921년부터 실시한 경제정책 체계. 약칭으로 네프(NEP)라고도 한다. 그 이전의 전시(戰時)공산주의와 비교하여 신경제정책이라고 하였다. 21년 초 소련은 제 1 차세계대전과 1917년 10월혁명, 국내전쟁과 외국군사간섭 등 계속된 중압·동요·혼란에 의해서 극도의 황폐와 경제적 피폐를 겪고 있었다. 전쟁 전과 비교해 볼 때 공업생산은 약 20%, 농업생산은 약 60%로 떨어졌으며 국민의 불만, 특히 인구의 70∼80%나 되는 농민층에서 정부에 대한 불신이 증대되고 있었다. 소련공산당과 정부는 위기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경제정책의 극적 전환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전시공산주의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던 식량할당 징발제가 폐지되고, 식량현물세가 도입되었다. 납세 뒤의 잉여곡물 처분은 당초 시도되었던 조직적 상품교환의 실패 후 농민의 자유에 맡겨졌고, 현물세도 차츰 화폐납입으로 대치되었다. 그 결과 도시와 농촌의 관계에서 상품경제가 지배하게 되었고, 소상품 생산자인 농민의 물질적 관심이 촉진되었다. 한편 국영공업은 트러스트로 재편성되어서 상업계산제(商業計算制)로 옮겨졌으며, 또한 일부 기업은 다시 사유화되어 중·소규모의 사영 상공업경영이 합법화되었다. 25∼26년에는 공업생산 가운데 사적 부문의 비중이 27.1%까지 달했으나, 이 때에도 대공업·은행·운수·외국무역·토지 등 <관제고지(管制高地)>라고 일컬어지던 중요한 경제영역은 국가가 장악하고 있었다. 1923년의 협상가격차공황의 극복, 다음해 화폐개혁의 성공 등을 거쳐서 경제부흥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런 뜻에서 신경제정책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 뒤의 공업고정자본의 재건, 농업경영의 개조와 같은 새로운 과제를 앞에 놓고 신경제정책은 시련에 직면하게 되었다. 신경제정책이 끝난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예를 들어 신경제정책이 사회주의로 가는 과도기에서의 정상적 경제정책이라는 통설적 견해에서 볼 때는 30년대 중반, 경제부흥을 위한 자본주의의 부활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는 1926∼27년, 그리고 신경제정책의 근간으로서 도시와 농촌간의 상품경제적 연결을 중요시하는 입장에서 볼 때는 강제적 농업집단화가 시작되었던 30년 무렵이 각각 끝난 시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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