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한국과 일본의 외교정책
강량 / 예진출판사 / 1994년 10월
평점 :
품절


옛날에 이 양반이 책이 상당히 잘되서, 이 양반 책을 검색중에 흥미로운 기사를 읽고......인생만사 새옹지마네요......

돈가스 튀기는 정치학 박사 강량


“처갓집 가업 잇는 장한 사위랍니다”

영국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해외 공보관, 교수 등으로 활약하던 강량 씨(40). 그가 자신의 모든 직책을 접고 장인의 가업을 이어받아 돈가스 전문점 사장이 됐다. 정치, 경제를 논하던 것에 비하면 돈가스 집 사장이란 덜 그럴듯해 보이기 쉽지만, 그는 나이 마흔에 새로운 인생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그의 새로운 목표는 돈가스 박사.

9개월 전만 해도 국무총리실 산하 국정홍보처 전문위원으로 활약했던 정치학 박사 강량 씨. 그는 요즘 주방에서 양배추를 썰고, 고기를 튀기는 돈가스 집 사장이다. 그 이유는 처갓집의 가업을 이어받기 위해서.
“장인어른께서 18년간 명동 돈가스의 전통을 지켜오셨는데 누군가 그 맥을 이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집안의 가업을 잇는 것도 박사, 공무원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에 가던 길을 돌렸습니다.”
강씨의 장인 윤종근 씨(66)는 18년 전 명동 돈가스를 차렸다. 윤씨는 일본 출장길에 맛있게 먹곤 했던 ‘동키돈가스’같이 만들어 팔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83년 7월 서울 명동에 명동 돈가스를 오픈했다. 도쿄 교외 메구로에 위치한 동키돈가스는 일본에서도 최고를 자랑하는 돈가스 전문점으로 52년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데, 윤씨는 처음 이곳 동키돈가스 사장을 찾아가 돈가스 제조비법을 전수받고 명동으로 그 맛을 옮겨왔다. 그때만 해도 흔치 않았던 돈가스 전문점은 사람들이 큰맘 먹고 칼질 한번 하러 가는 곳이었는데, 명동 돈가스는 줄곧 호황을 누려왔다. 이제는 명동점 2곳과 압구정동점이 하나 더 늘어나 직원수만 해도 90명 규모인 중소기업 수준이다.
이러한 명동 돈가스의 가업을 이어갈 사람은 사실 그의 처남이었다. 하지만 10년 전 교통사고로 건강이 좋지 않은 처남을 누군가 대신해야만 했다. 장인인 윤씨는 그때부터 사위를 점찍었다.
“하지만 박사 사위라고 제게 미안해서 직접 말씀도 못하셨어요. 괜히 빙빙 돌려서 ‘자네 월급이 얼마지? 돈가스집 사장이 돈은 더 많이 벌텐데…’ 하는 식으로 당신 뒤를 이어줬으면 하셨죠. 그래서 저도 내내 생각해 왔는데 올 들어 아버님 건강도 좋지 않으셔서요.”
이렇게 해서 강씨는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벗어던졌다. 처음엔 어색했던 주방 유니폼도 이제 제 옷 같아지고, 남들 보기에도 어느새 돈가스집 사장이 다 됐다. 이번에 메뉴판 등을 새로 제작하던 중에는 그의 둥글둥글한 체구에 유니폼과 모자, 앞치마가 너무나 잘 어울려 아예 그의 캐릭터까지 생겨났을 정도다.

친구들도 부러워한 돈가스집 딸과의 데이트

그는 신문기자 출신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경희대와 동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1989년에는 영국으로 건너가 캐슬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이후 케임브리지대학 박사후 과정을 거쳐 일본 게이오대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지냈다. 94년 귀국 후 한양대, 고대, 경희대 등지에서 정치학 강의를 했고, 95년 공직에 특채됐다. 그리고 국정홍보처를 마지막으로 공직에서 물러나게 됐다. 그는 일찍부터 정치에 대한 매력을 느껴 한번도 다른 인생은 생각해보지 않고 매진해왔다.
그런데 돈가스집 맏딸을 만나면서 그에게는 또 다른 인생이 준비되어 있던 셈. 일단 돈가스집 딸과 연애를 하게 됐으니 그는 돈가스만큼은 원없이 먹을 수 있었다. 돈가스에 얽힌 추억이 그에게 너무나 많다.
“제가 연애할 때 제일 신이 난 사람들은 제 친구들이었어요. 그 당시 학생 신분으로 값비싼 돈가스를 먹어보겠습니까. 그래서 얼마나 절 부러워했나 몰라요. 물론 친구들을 데리고 여러 번 돈가스를 먹으러 가기도 했어요. 또 아내가 용돈을 털어서 저희 친구들에게 많이 쓰기도 했죠.”
벌써 결혼한 지 14년. 그는 아내와의 사이에 초등학교 6학년, 1학년인 남매를 두었다. 그런데 자신이 공직 생활을 접고 돈가스집을 맡겠다고 하자 뜻밖에 큰아들의 반대가 가장 심했다.
“아이는 제가 존경받는 공직자, 교수였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돈가스집 사장은 창피하다구요. 그래서 제 뜻을 잘 설명했죠. 그리고 아빠가 잘 지켜서 나중에 네가 원하면 그때 물려주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이해하더라구요.”
강량 사장은 요즘 주방 일을 전수받느라 하루가 모자랄 지경이다. 이제 돈가스 튀기는 일과 미소라멘 정도는 끓일 줄 안다며 자신감을 보인다. 처음엔 그저 모든 것이 어려웠다. 주방일도 어려웠지만 늘 대접만 받고 살다가 손님들에게 머리 굽혀 인사하고 박사가 아닌 사장, 아저씨 등의 호칭으로 불리는 것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종종 함께 일했던 공직자들이나 동료들이 근엄한 양복 차림에 스마트한 모습으로 몰려올 때면 괜히 기가 죽기도 했다. 하지만 미련이나 후회는 없다.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다고 돈가스집 사장이 된 후로 그는 순박한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생활의 잔재미에 빠져 있다. 늘 긴장하며 살다가 뭔가에서 풀려난 신선한 해방감이 삶의 여유도 가져다주고 있다. 물론 돈가스집 사장이라고 신세가 편한 것만은 아니다. 이제 90명의 식솔을 자신이 책임져야 하고, 장인이 탄탄하게 일궈놓은 것을 잘 지켜가야 할 의무도 있기 때문이다.
“돈가스도 이제 흔하디 흔한 음식이 돼버렸지만요, 그게 다 똑같은 음식은 아닙니다. 누가 어떻게 만들었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일 거예요. 저는 아버님의 장인 정신을 계승시켜 명동 돈가스만의 특별한 맛을 지켜가겠구요, 좀더 요즘 세대에 맞는 변화도 시도할 생각입니다.”
그의 포부는 대단하다. 해외에도 명동 돈가스 지점을 세우는 것이 꿈. 계획상 1호점은 런던, 2호점은 파리, 3호점은 시드니 등이라고. 이제 돈가스 만드는 일도 자랑스럽다는 그는 돈가스 박사가 되어 보겠다는 의욕에 가득 차 있다. 나이 마흔에 다시 시작한 인생, 그는 요즘 부쩍 행복하다.

글·장주연|사진·김영훈 차장(yhki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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