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오는 날의 사랑노래
1.
온다는 말도 없이
내리고 있어
소리없이
첫눈
2.
기다리는 자에게
모든 눈은 첫눈이야
모두가 잠든 새벽
잠 못 들고 눈밝히는 눈으로
무언가를 누군가를 간절히
기도하는 자에겐
언제 와도 언제 봐도
첫눈
3.
어제 새벽 첫눈을 바라보며
소주를 마셨어
그럴 때 눈은 펑펑 내리는 게 아니야
푹 푹 내리지
발목까지 허리를 넘어 검은 눈동자만 남기고
어둠의 심연을 모조리 그러나 소리없이 삼킬 것만 같이 정말
푹 푹 내리지
4.
저 멀리 북방의 만주를
아직도 떠도는 백석의
흰 런닝구가 불현듯 떠올랐어
때가 절고 구멍이 송송 뚫려 바람 새는,
화롯불을 부여잡은 채 흰 바람벽을 바라보며
아니 들여다 보며 그는 무엇을 그토록 그리워했을까
남쪽의 평북 정주
더 남쪽의 비릿한 바다내음 나는 통영을
북쪽 저 멀리 바이칼 호 넘어
러시아의 상테크부르크 옆
자작나무숲에 깃든
나타샤
5.
자작나무숲으로
사람이 아닌 숲의 정령들이 이끄는 대로
그 안의 오두막에 가는 건
세상에게 지는 게 아니지
뒤돌아보지 않는 아니 뒤돌아 볼 수 없는 저
세상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거겠지
그래 백석, 그의 영혼과 함께
독주
내가 느끼는
눈 오는 날의 유일한 시인
6.
베아트리체
단테가 사랑한 소녀가 아닌
‘나무를 마음에 새긴 몸’
베아. 트리. 체
이 무지한 명명법을 비웃어도 좋아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나의, 나만의 베아트리체
어디에? 너는
7.
쓸쓸한 해안의 눈보라를 떠올려
조용히 이름을 부르면 눈처럼 부서질 것만 같은 그 곳
이슬라 네그라
거기 있을지도 몰라
길게 뻗은 해안
뜨겁던 여름이 다 지고
언제나 사랑의 예감이 바람과 눈으로 불어
내리는 거기
멀리
이슬라 네그라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는다’는 유명한 제목을
겁 없이 차용하고 싶어
‘이슬라 네그라 거기에 가서 나는 죽다’ 라고
행복한 유언을 남기고만 싶은 곳
그곳은 남반구
눈이 내리지 않는다 라는
이성적인 설명은 사양하고만 싶은
언제나 눈이 푹푹 내리는 내 감각의 영토
8.
미황사
거기도 눈이 내린다는 소식
친구가 아닌 바람이 전한 소식
이 세계의 변방
가장 쓸쓸한 변두리의 땅 끝 마을
감히 선언컨대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절
미황사
해가 질 때
해가 뜰 때
고요히 네 긴 손을 붙잡고
저 멀리를 오래도록 함께 바라보고 싶은
끝끝내 나만 알고 싶던
베아트리체
9.
섬
그 이름 덕적
그러니까 덕적도
이별과 애도의 시간을 관통하며
작은 증기선을 타고
쓸쓸히 네가 다녀온 곳
돌아올 선착장 연안부두에서
언제 올지 모를 배를 기다리며
오래된 해삼에 소주를 기울이며
너를 기다리던 곳
너보다 오래 전
나 역시 홀로 추억의 끝 바위너설에 서서
비릿한 바다내음을 오래 마시다 왔던
예보도 없이 눈보라가 퍼붓던
덕적
10.
저물 무렵 아님 모두가 잠든 새벽
외롭고 허전한 그 시린 生의 시간에만
바라볼 수 있는
단 하나의 별
금성
미황사 그 절 해우소 앞
어미 잃은 개 한 마리 목줄을 당기며
올려다 보던 밤하늘 거기
밥풀처럼 떠있던 그 개밥바라기
별
홀로 서는, 아니 서야만 하는 시간에 아프게도
멀리 멀리서 그리움을 말없이 부르는 그
별
현실인 듯 이상인 듯
아슬아슬 경계의 줄타기를 하는 것만 같은
별
그러나
반드시 눈이
눈보라가 내려
푹푹 쌓이고 있을
거기
금성
중력의 고마움을 모르는
지구별의 내가 너와 함께
가 닿고 싶은
무엇도 당길 수 없는 우주의 칠흑
그 심연의 어둠을 뚫고서
깃들고만 싶은
거기
11.
누구의 연인이었든
그 무엇이 인연이었든
지금 부는 바람처럼 나에게로 부는
바람
지금 내리는 눈처럼 나에게로 퍼붓는
첫눈
12.
서슬 퍼런 바람도
눈보라 치는 추위도 관념이 아니듯
사랑이라는 말은 결코 관념이 아니지
눈보라가 치는 거리로 나와보면 알아
유리창 안에서 상상의 나래를 펴는 건
사랑의 열망은 될 순 있어도 결코
사랑이 될 순 없다는 걸
13.
나올 수 밖에 없었어
눈보라를 맞으며 바람을 뚫고
길
언제나 목적일 수 없는 과정인
길 위에서 도무지
언제 멎을지 모르는 이 착하게 늙은 차
하얀 세피아
위로 새하얀 눈보라를
이 낡은 영혼이 되어
14.
아무 것도 아직은 보이지 않는 어둠의
새벽
예보도 없이 눈보라가 퍼붓는
길
길의 종착역은 없어
세상의 길이란 길은 다 지워져 버렸으니까
그러나
베아트리체
내가 가는 길 위에
15.
미황사
이슬라 네그라
덕적 그 외로운 섬
그리고
금성
그 열망의 이름들은
동일한 메타포일 수 밖에
16.
바로
가는 길
간다는 그 어떤 생각도 없이
가고 있는 길
가야만 하는 길
목적이 아닌 영원히
과정일지도 모를
메타포
17.
이 지치고 비루한 몸이
낡은 영혼의 차를 얻어 타고
느리게 느리게 갈 수 밖에 없는
길
내 몸이 갈 수 없는 곳에서도
한 발 한 발 그리움을 디디는 마음의 길
18.
가는 길
내가 가는 길 위에
눈이 푹푹 나리고
눈 감고 바라본다
오늘도
거기
너의 가슴 속
19.
바로 거기
사랑의 은유
너
베아트리체
-- 어제는 하루종일 올 겨울 들어 눈이 정말 많이 내렸습니다. 세상의 길이란 길들은 모두 지워버리며 정말 펑펑 내렸습니다. 차를 두고 출근을 하는 새벽에 아무도 아직 밟지 않은 눈밭에 발을 디디는 데 소리없이 쿵쾅쿵쾅 가슴이 떨렸습니다.
마치 당신에게 첫눈에 반했던 그 순간 속으로 걸어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마치 당신의 그 맑고 고운 눈에 제 눈을 맞추고 한참동안 서로의 눈에 서로의 모습을 비추던 순간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물론 어제의 눈이 이 시린 겨울의 첫눈은 아닙니다만... 저는 가슴으로 사랑을 새기고 앓고 기다리는 사람에게 모든 내리는 눈은 첫눈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녁엔 학교 근처 한 허름한 선술집에서 소주를 딱 한 병 마셨습니다. 창 밖에는 정말 백석의 표현대로 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함박눈이 아름답게 내리고 내렸습니다.
멀리 남쪽에 계실 당신이 그리웠습니다. 거기에도 이렇게 눈이 침묵의 그리움으로 펑펑 쏟아져 내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폭설 속으로 이 빈 몸을 끌고 마냥 가고만 싶었습니다. 그 곳은 그리움의 힘으로 일년 내내 눈이 그치지 않는 곳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곳은 덕적, 미황사, 이슬라 네그라, 금성... 제가 그토록 가고 싶은 공간의 은유이니까요!
그 곳은 바로 당신이 고운 눈으로 여전히 나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아름다운 눈의 나라!
바로 당신의 가슴 속! 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