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아트리체 -작은 연가戀歌
표절인지도 모르고
한 번뿐인 인생을 표절로 사는
사람들은 모르지
환상으로 시작해서
환상으로 사랑을 완성해
황홀하게 미소짓는
피그말리온들은 모르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고
우물 속으로 뛰어든 그런
나르키소스들은 모르지
아무리 멋있고 우아하게 살았다 자부해도
그건 서글픈 데쟈뷰인걸
이 세상 모든 여인보다 아름다운 아름다움이라해도
그건 심장이 뛰지 않는 갈라테이아
춤추는 마리오네뜨 같은 인형인걸
호숫가 근처 처연하게 맑은
수선화 그 꽃이 피었다해도
그건 한 번도 남을 사랑해보지 못한 외로움인걸
육체의 어딘가에
사랑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모르지
끊임없이 물어보고 확인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모르지
단테의 사랑을
베아트리체
묻지 않아
사랑은
사랑하느냐고 묻지 않아
그냥
사랑하는 거야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거야
--- 길이 우리 삶의 메타포라는 흔한 비유는 식상하지만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하루 하루 길을 걷는 일은 인간의 몸을 받은 우리들이 피할 수 없는 삶일 수 밖에 없구요. 가는 길 위에서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고 아파하고 가슴 깊이 그 사람을 마음에 새기게 될 것입니다.
'베아트리체'는 단테가 아주 어린 나이부터 죽을 때까지 사랑한 소녀의 이름입니다. 그러나, 단테의 사랑을 숭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가슴 속에 새기고 사랑하는 영혼의 이름을 베아트리체라고 말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일을 진정 그 사랑의 대상을 온전히 사랑하는 행위라고 생각하고 믿습니다. 그런 믿음으로 사랑함의 행위를 실제 하고 있다고 굳건히 믿구요. 그러나 누구의 잘못이었든지 간에 사랑의 감정이 거짓말처럼 끝난 오랜 시간 후에 불현듯 그것이 그 사랑의 대상을 사랑했던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을 지극히 사랑했다는 불편한 진실에 맞닥뜨리는 경우가 생기곤 합니다.
부끄럽지만, 고백컨대~ 저는 지금껏 타인이라는 거울에 비친 '나'(자기 자신)를 사랑하는 나르시스였습니다. 그 사람에게 투영된 '나'의 이미지를 지극히 사랑해 왔던 것이었지요. 해석의 다양함 때문에 꼭 그렇다 말하긴 그렇지만, 기형도 시인의 '질투는 나의 힘'의 마지막 구절 역시 그렇습니다. '내 생은 미친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라는 가슴 아픈 탄식은... 아프게도 제 가슴이 슬프게도 고백해야만 했던 한탄이었다는 걸 뒤늦게 저는 깨달았습니다.
그 깨달음의 중심에 저의, 저만의 베아트리체가 있었습니다. 당신의 눈을 통해 저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지극히 아픈 상처와 흉터들을 눈물을 흘리며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비루하고 누추한 영혼이지만, 내 아프고 병든 영혼의 눈으로 당신의 맑고 고운 모습과 서럽게 아픈 눈물까지 비추어 줄 수 있었습니다.
사랑이란 나의 눈으로 너를 비추는 것이자 동시에 너의 그 검은 눈동자가 비춘 나의 모든 것들을 용기있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이라는 걸 알려 준 사람이 바로 베아트리체였습니다.
사랑한다면... 묻지 않아야 한다는 서러운 진실을 알게 해 주는 사람이 지금 당신 곁에 있는지요?
있다면 당신은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고 감히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