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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1월
평점 :
딱히 관심이 갔던 것은 아니다. 빨책 피드에서 제목을 보고 에라이 금수만도 못한의 금수인 줄 알고 계속 이것만 건너뛰고 듣다가 더이상 들을 에피소드가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대체 이 책은 뭐야 하고 눈길을 주었는데. 일단 hellas님의 리뷰를 통해 가가 가가 아니더라는 정보를 입수 (금수는 금으로 놓은 수 였던 것이다!), 난데없는 호기심이 발동해 미리보기까지 꼼꼼히 읽은 뒤 급기야는 작가의 전작인 환상의 빛까지 세트로 주문을 하기에 이른다.
(아래 스포일러 있습니다.)
미야모토 테루는 이 금수라는 독특한 제목의 책을 통해 뜻하지 않은 일로 파국을 맞게 된 남녀관계의 종결에 대해 이야기한다. 제대로 매듭을 짓지 못하고 헤어진 두 남녀가 각자 십년이라는 세월을 혼란과 후회, 그리고 죄책감속에 살아오다 정말 우연한 재회를 계기로 몇차례 편지를 주고 받게 되고, 그를 통해 마침내 서로를 옭아매온 과거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 나아갈 방향을 잡는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첨엔 그냥 막연히 십년전 오해를 풀고 우리 다시 한번 잘해보자고 쓰는 편지인 줄 알았다. 다 읽고 나서 보니 아키라는 여자가 전 남편에게 편지를 보낸 이유는 (본인도 무엇때문에 쓰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했으나) 어처구니없이 끝나버린 자신들의 관계에 대해 무언가 납득할 만한 closure을 받아내고 싶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어쩌면 자신이 현재와 미래를 온전히 살아내기 위해서는 과거를 매듭짓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생존의 본능처럼 느끼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더이상 원치 않는다는 그의 직접적인 요청에도 불구하고 편지는 계속된다. 아키는 단 한번도 아니 당신이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죠 하며 흥분해서 따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제와 그런건 아무래도 좋다고 말하며 원치 않는 편지를 자꾸 보내게 되어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다. 하지만 쓰고 싶으니 계속 쓰겠다고, 그 후로도 멋대로 이어지는 그녀의 편지는, 되레 더욱 끈질기게 상대의 해명을 요구하는 무언의 압박에 가깝다. 진짜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면 편지쓰는 것을 그만두었겠지. 사실 미안한 마음보다는 당신이 나한테 잘못한 게 있는데 이 정도는 해주어야지요 하는 보상심리가 더 크게 깔려있었던 게 아닐까. 남자 역시 편지를 받고 며칠동안 서랍에 넣어두지만 결국 무음의 신호처럼 저항할 수 없어 읽고 말았다고 후에 털어 놓는다. 오히려 나약하고 위태로웠던 것은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아리마 야스아키라는 남자였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요즘 같이 지내는 여성 레이코에 대해 아키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 저는 레이코가 울어서 아주 만족했습니다. 아직 저는 당분간 레이코와 헤어질 생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심한 일이지만 레이코와 헤어지면 저는 당장 내일부터 먹고살 수가 없습니다. 저는 레이코의 입에서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말이 듣고 싶어서 어제도 오늘도 헤어지자, 헤어지자며 그녀를 괴롭혔던 것입니다 -
이 아리마 야스아키라는 남자는 내가 근래 본 심리서에 등장하는 가면 속 어린 아이의 표본이다. 어른의 모습을 하고서 살지만 실은 성장이 멈춘 이기적인 어린 아이. 사람이란 아무래도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 법이므로 레이코 역시 이 남자에게 비빌 언덕을 제공한 댓가를 치르는 것이겠지만 만일 레이코가 내 친구였다면 도시락 싸들고 다니며 말렸을 최악의 남자다. 완전 여자 등쳐먹는 놈이 아닌가! 내가 보기엔 유카코나 아키에게도 결코 좋은 남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어리광을 다 받아주고 무작정 그에게 휘둘리고 있는 줄만 알았던 레이코가, 아직 어린애같은 그를 은근슬쩍 조련하기 시작한 것은 뜻밖의 반전이었다. 뭐 굳이 그런 남자한테 투자를 하고 고생을 사서 하겠다면 맘대로 해라. 사랑은 자유니까.
그들의 미래가 어찌되려건 간에 나는 이 책을 상당히 재밌게 읽었다. 그래도 딱 두가지만. 내가 공감할 수 없었던 것 딱 두가지만 말해야겠다. 첫째, 야스아키의 여자들이 하나같이 너~~무 쿨하다는 것이다. 이건 작가의 판타지인가?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나름 행복했던 다년간의 결혼생활이 파탄이 났는데 어째서 아키는 따져 묻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가. 게다가 십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왜 못다한 울분을 토해내질 않고 오히려 숙이고 들어가 야스아키의 입장을 먼저 헤아리는 (혹은 헤아리는 척하는) 자세를 보이는가. 왜 저렇게 서로에게 예의를 갖추고 깍듯한가. 헤어진지 십년이란 세월이 흘러서? 세월이 약이라서? 혹은 아키는 장애아를 낳아 키우면서, 야스아키는 수차례의 사업 실패로 인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어 둘다 정신적으로 대단한 성장을 하기라도 했다는 건가? 야스아키의 새 여자인 레이코도 그렇다. 야스아키가 전 부인 아키에게 받은 편지들을 다 읽고나서 한다는 소리가 그저 ˝전 당신의 부인이었던 사람이 좋아요.˝라니.. 같이 사는 남자의 전 부인이 좋아요~ ♬ 라니!!! ㅡㅡ;; 그리 유복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랐지만 혼자 열심히 벌어 당당히 자립하고, 모아논 돈도 좀 있고, 부모님 생활비까지 보태는, 이정도 따위 일엔 흔들리지 않을 저력이 있는 여성이라 이거냐. 아침드라마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이 여자들 쿨해도 너무 쿨하다. 불쾌한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미성숙한 태도라고 일관하는 것 같고, 또 한편으로는 남자의 외도에 대해 작가가 꿈꾸는 이상적인 여성상의 성숙한 리액션을 그려놓은듯한 의구심마저 든다. 하물며 야스아키를 한 눈에 반하게 한 유카코의 매력도 나이에 맞지 않는 성숙한 자태가 아니던가. 모두 쿨방망이로 궁둥짝을 한대씩 때려주고 싶다. 도대체 얼마나 쿨해야 성숙한 여자인거냐.
두번째로 공감할 수 없었던 것은 작가의 세계관인지 등장인물들이 가진 세계관인지가 참 모호한,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정의? 아키와 모짜르트 까페주인, 그리고 야스아키의 입을 통해 계속해서 반복되는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은 어쩌면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라는 아키의 말에 나는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세 사람은 이 말에서 마치 무슨 거대한 우주의 비밀을 깨우친 것 마냥 이 말이 주는 의미를 각자의 경험에 비추어 해석하고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린다. 내가 종교가 있어서 그런지 어떤지는 몰라도 내게 있어 큰 울림이 있는 구절은 아니었다.
그들이 서로에게 그토록 장문의 편지를 쓰게 될 줄 몰랐듯 나도 내가 이렇게 기나긴 리뷰를 쓰고 앉아 있게 될 줄 몰랐다. 내가 쓴 리뷰중에 젤 길다. 별점을 다섯 개를 매긴 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할 말이 많았는지 모르겠다.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다가 이제 철이 좀 들려고 하는 야스아키의 말을 남긴다. 작가가 등장인물의 말을 빌어 뭔가 대놓고 교훈을 주려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해도, 좋으니까.
미용실을 찾아서 걷는 이 행위가, 과장된 표현이지만 인생 그 자체 같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네거리에 서서 자, 어디로 갈까, 하고 생각하여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점점 인적이 드물어지고 어쩐지 공장가를 헤매게 되어 미용실 같은 건 절대 있을 것 같지 않은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상당한 거리를 와 버렸기에 다시 돌아갈 수도 없어 공장이 길게 이어진 길을 바보처럼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가까스로 동네다운 곳에 이르렀을 때는 날이 저물고 게다가 그곳이 어디인지, 어떻게 돌아가야 좋을지 알 수 없어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충동에 시달립니다. 이렇게 녹초가 된 상태로 미용실 한 곳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귀가한 일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네거리에 와서 에잇, 이쪽이다, 하고 걷기 시작하면 곧바로 신흥 주택이 늘어선 곳이 나와 개점한 지 얼마 안 된 미용실을 발견하고 간단히 계약을 할 때도 있습니다. 오른쪽으로 갈까, 왼쪽으로 갈까, 꼭 인생이구나, 하며 묘하게 감탄하면서 저는 매일 계속해서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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