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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
후쿠나가 다케히코 지음, 박성민 옮김 / 시와서 / 2023년 8월
평점 :
‘나‘는 시오미 시게시와 요양원의 같은 병실을 쓴다. 그리고 그가 죽기 전 유품으로 남긴 두 권의 노트에서 열여덟 살의 봄과 스물네 살의 가을을 회상하는 그를 만난다.
어린 날에 만났더라면 조금 위험했을지 모를 그는 고독을 이야기했고 한발 물러나 관전할 수 있는 나이에 다시 마주한 청춘은 내 좌절과 절망의 시간에 기름을 끼얹지 못했다.
그럼에도 내 마음이 동요한 것은 아마도 시오미 시게시가 죽는 날까지 극복하지 못했던 허무감 속에 나 역시 아직도 완전한 어른이 되지 못한 채 머물고 있는 까닭이다.
내가 요양원에 있는 동안은 열 명 이상의 사람들과 한방을 썼다. 그들은 다들 ‘우연‘이 인생의 도중에 가져다 준 한때의 친구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낮에는 낮의 불안을 함께하고 밤에는 밤의 공포를 함께하는 이 여섯 명의 환자들 사이에 깊은 우정이 흐르지 않았을 리가 없다. 이것을 한때라고 부른다면, 한때가 아닌 우정이 어디에 있을까. 하지만 한 사람은 한 사람만큼의 고독을 품고, 저마다 폐쇄된 벽안에 웅크린채, 자신의 고독의 무게를 헤아리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한 사람 한 사람은 서로 다른 나이, 서로 다른 인생 경험, 서로 다른 병증에 따라 독립되어 있어, 서로를 잇는 우정과 우정 사이의 틈새에 질투나 선망, 증오같은 감정, 무엇보다 에고이즘이 숨겨진 감정이 감춰져 있지 않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 P15
사람은 누구나 죽을 것이고, 나 역시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그런 건 처음부터 알고 있다. 다만 사람은 그것이 언제일지 미리 알수 없기 때문에 마음 놓고 일상 속에서, 살아 있다는 걸 깨닫지도 못한 채 헛되이 세월을 보내는 것이다. - P59
옛날의 나는 무지몽매한 소년으로, 아무것도 모른 채 인생의 미로를 걷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내 마음은 갈망으로 넘쳐흘렀고, 인생은 살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고, 오로지 영혼을 아름답게 할 수 있기만을 바랐다.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는가. 열여덟살의 내가 사랑했던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지금 내게 없다. 스물네 살의 내가 바랐던 것처럼 바라는 사람은 지금 내게 없다. 나는 결코 옛날에 살았던 것처럼 지금을 살고 있지는 않는 것이다. 정말로 그럴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과연 내가 그렇게 눈부시게 과거를 살았을까? - P63
"하지만 전 어디에 있어도 제 존재가 쓸데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제 고독이야 어쩔 수 없지만, 남한테 피해 줄 생각은 없으니까요." - P115
"난 말이야, 진짜 고독이란 그 무엇에도 상처받지 않는 것, 어떤 괴로운 사랑에도 견딜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 그건 영혼의 강하고 적극적인 상태라고 생각해. 예를 들면, 기도하고 있는 인간의 상태 같은 거지. 기도는 신 앞에서는 갈대처럼 나약한 모습이지만, 인간들 사이에서는 더 이상 뺏길 게 없는, 한계까지 다다른 강함을 보여주지. 고독이란 그런 게 아닐까?" - P117
"전 너무 두려워서…... 그게 아니라도 우리에겐 선천적으로 사랑해야 할 사람이 주어져 있어요. 부모나 형제 같은…… 전 어릴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어요. 그런 어머니의 애정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걸 어머니께 돌려드려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에, 전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제가 좋은 성적을 얻으려고 미친 듯이 공부하는 것도 오로지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에서예요. 지에코도 있고, 보세요, 전 주어진 것만으로도 너무 힘에 겨워요. 더 이상 저 스스로 누군가를 선택할 수도 없어요…..." - P131
"그건 그런데, 거기 곶 끝에 말이야, 너 거기 간 적 없어?" "곶 끝에요?" 후지키는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보았다. "거긴 자주 갔어요." "자주? 아무도 안 가는 거기에?" "생각할 게 있으면 종종 그곳에 갔어요. 그런데 선배는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거기 한 번 산책 간 적이 있거든. 널 보고 불렀는데 안 들렸나 보네. 왠지 너무 황량해서 우울해질 것 같은 곳이야." "그런가요?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왜?" "왜긴요. 어디에 있든 똑같아요. 어디에 있어도 외로워요." - P172
"꿈이라도 좋잖아. 난 그런 식으로 살아 있는 거야. 난 매일 직장에 나가서 속된 이탈리아어로 편지 따위를 쓰고는 있지만, 그보다는 하숙방에서 페트라르카를 읽고 있는 쪽이 훨씬 더 진짜 내 모습이야." - P190
"나한테 외부의 현실 따위는 문제가 아냐. 내부의 현실만이 문제야. 물론 나도 징집되면 이런 소리는 할 수 없겠지. 게다가 언제갈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그때까지만이라도 가장 나답게, 후회 없이 내 시간을 쓰고 싶은 거야." - P191
"오빠는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이에요. 네, 그래요. 옛날에 시노부 오빠를 좋아했을 때도 오빠는 꿈을 꾸고 있었어요. 난 시노부 오빠가 한 말을 잊을 수가 없어요. 시오미 선배는 꿈을 꾸고 있어, 하지만 난 그걸 볼 수가 없어, 라고요. 나도 그래요." - P193
하지만 난 그 1달란트를 땅에 묻은 하인을 쫓아낸 주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어. 머리도 나쁘고 재치도 없고, 그저 주인의 말을 중히 여기고 어리석은 행동을 했어. 그게 쫓겨날 짓이라면 그 종교는 너무 엄해. 너무 비인간적이야. 아니면 너무 이해타산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 P219
말하자면, 나는 무엇에나 다 반항했다. 기독교에도 마르크스주의에도, 가정에도 학교에도, - 하지만 그것들은 결국 미온적인 반항, 나 자신이 손해 보지 않을 정도의 반항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을 딜레탕트로도, 학자로도, 또한 예술가로도 만들지 못했다. 나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어찌할 줄을 모르는, 겁쟁이에다 고독한 청년이었다. - P228
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뭐라 말할 수 없는 회한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무리 입이 닳도록 이야기한들 사람은 자신의 의지를 타인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지에코가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될수도 없고, 내가 신을 믿고 기독교인이 될 수도 없다. 사랑도 역시, - 어쩌면 사랑 역시 인간이 마음속에다 그린 이미지를 자신의 고독으로 색칠하고 자기 멋대로 꿈을 꾸고 있는 것일 뿐일지도 모른다. - P258
나는 나의 고독을 죽일 수가 없었다. 그토록 무익한 고독이 지에코에게 있어 하나님의 존재처럼, 내 작은 존재이유의 전부였다. 이 고독은 무익했다. 그러나 이 고독은 순결했다. - P264
그분이 저를 볼 때, 어떤 이상형을 두고 저를 보고 있다는 생각은 제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저는 평범한 여자입니다. 그런 저를 그분은 비범하다는 듯이 보셨습니다. 그런 착각은 언젠가는 깨어지는 법입니다. 언젠가는 그분이 환멸의 눈으로 저를 바라볼 거라는 생각을 하면, 저는 소름이 돋았습니다. 그분은 꿈을 꾸며 사는 사람이었고, 저는 현실밖에 볼 줄 몰랐습니다. -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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