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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ㅣ 열린책들 파트리크 쥐스킨트 리뉴얼 시리즈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4월
평점 :
무너진 일상 앞에 인간은 얼마나 취약한가.
상상력이란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한 능력이라고 (예를 들면 뜨거운 것을 만지면 어떻게 되는지,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지,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상상만으로 그 고통을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그런 기능을 한다고) 어디선가 본 거 같은데, 과도하게 발휘된 상상력이 되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 근심, 만병의 근원이 되어 버렸네...
조나단 노엘의 방인 24호실은 세월이 흐르면서 비교적 안락한 주거지로 변했다. 그사이에 침대도 새것으로 바꾸었고, 붙박이장을 하나 마련했으며, 7.5제곱미터의 방바닥에 잿빛 카펫을 깔았고, 음식을 조리하는 곳과 세면대가 있는 구석에 래커 칠을 한 빨간색 벽지를 붙여 놓기도 하였다. 라디오, 텔레비전, 다리미도 들여놓았다. 식료품은 과거처럼 자루에 넣어 창밖으로 걸어서 보관하지 않고 세면대 밑에 있는 난쟁이 냉장고에 넣어 두어, 뜨거운 여름날이라도 버터가 녹거나 소시지가 말라비틀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침대 머리맡에는 선반을 하나 매달아서 열일곱 권이 넘는 책들을 꽂아 놓았다. 포켓형 의학 사전 세권을 비롯하여 크로마뇽인과 청동기 시대의 주조 기술, 고대이집트인, 에트루리아인 그리고 프랑스 혁명을 다룬 몇 권의 아름다운 화보집, 범선에 관한 책 한 권, 여러 가지 깃발에 관한 책 한 권, 열대 지방에 사는 동물에 관한 책 한 권,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책 두 권, 생시몽의 회고록, 전골 요리책한 권, 라루스 사전 한 권과 직무상의 권총 사용 규정에서 특히 주의해야 할 점을 다룬 경비원을 위한 요점 정리 책자 한권 등이 있었다. - P10
조나단은 식사를 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보다 더 맛있게 음식을 먹어 보았던 적이 일생에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았다. 통조림에 정어리가 네 개 들어 있었으므로 그런 맛을 여덟 번 맛볼 수 있었다. 빵과 함께 온 신경을 집중하며 씹어 먹었고, 포도주도 여덟 번 마셨다. 그는 아주 천천히 먹었다. 언젠가 신문에서 배가 많이 고플 때 음식을 빨리 먹으면 몸에 좋지 않고 소화 장애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읽은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속이 메스껍거나 구토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천천히 먹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그의 인생의 마지막 식사가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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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자살해야지.」 그렇게 말하고 그는 잠에 빠져들었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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