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내가 말하지 못한 모든 것
에밀리 파인 지음, 안진희 옮김 / 해리북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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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가 강렬해서 읽기 시작했다. 첫장에 권김현영님의 추천사가 있어서 좋은 책을 골랐구나 싶었다. 첫장은 알코올 중독인 아버지의 간병부터 시작된다. 중간에 가면 10대 시절의 가난, 가출, 마약, 섹스 등의 이야기도 나온다. 연대기적인 구성이 아닌 것은 의도가 있지 않을까. 자극적이고 잘 팔릴것 같은 정교수의 10대 시절 방황보다 돌봄의 이야기로 시작된다는게 좋았다. 한국의 여자 교수님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쓸 수 있을까란 생각도 든다. 여자 교수들 중 남편에게 맞는 사람도 꽤 있다고 들었으나 가정 폭력 미투는 나오지 않았던 것을 보면 여자들이 어디까지 참을것인가 싶기도 하다. 

돌봄, 섹스, 생리, 임신, 거식증 등 여자들이 "여자"라서 겪는 일들을 더 많이 이야기하고 더 많이 들렸으면 좋겠다.  

여성의 가치를 몸을 통해 규정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자기 자신의 몸을 통해 경험한 세계를 스스로의 언어로 표현하고 세계에 의미를 전달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침묵을 깨는 일은 용기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침묵을 깨는 일은 우리가 자신의 취약성을 가지고 무엇을 하기로 선택하느냐의 문제다. 취약성은 별개의 하나가 아니다. 치유도 별개의 하나가 아니다. 자기다움도 별개의 하나가 아니다. 이 모두는 서로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얽혀 있고 하나하나가 근원적이다.

경험들을 글로 써 내려가는 일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그렇지만 내가 이 고통을 회피하지 않은 것은 한 가지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글을 쓰고자 하는 충동이 위험하고 두렵다고 느껴지면서도 ‘필요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매우 오랫동안 그토록 철저하게 부정해왔던 나의 일부들을 되찾기 위해 이 에세이들을 썼다. 그리고 이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강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에세이들을 썼다.

여성들은 자기 신체를 평가하는 의례에 매우 익숙하다. 우리는 주변의 여성들을 쳐다보고, 자기 자신을 쳐다보고, 그리고 비교한다. 우리는 동등한가, 우월한가, 열등한가? 이를 피할 수 있는 여성이 거의 없다는 측면에서 볼 때, 이 의례에는 지독한 결속력이 있다. 이는 마치 부정적인 치어리더와 함께 사는 것과 같다. 우리의 몸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정상적이지 않다는 소리가 배경음마냥 우리의 귓가에 계속 웅웅거리며 들려온다.

나이가 나보다 많든 적든 수많은 남성은 내게 젊어 보인다고 말한다. 이들은 이 말이 칭찬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사실 이 말은 절대 칭찬이 아니다. 젊어 보인다고 말하면 여자들이 좋아할 거라고 남자들은 생각한다. 그들이 보기에 여성에게 외모는 가장 중요한 것이고 젊은 외모는 최고의 외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게 젊어 보인다고 말할 때, 혹은 내가 너무 순진해서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할 때, 혹은 내가 종신 재직권을 가진 교수임에도 내게 학생이 아니냐고 물을 때, 이 남성들은 내게서 십 년이 넘는 경력과 전문성을 박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흔히 칭찬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말은 사실은 즉각적인 격하에 불과하다.

학과장의 논평은 내가 강간에 관해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의견을 함축하고 있었다. 이는 단순히 ‘여성은 보이기만 해야지 의견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지긋지긋한 태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여성에게 자신이 속한 곳으로 돌아가서 입을 닥치고 조용히 있으라고 말하는 방식이다.

성차별을 인식하고 공격하고 바로잡는 일 모두가 오직 여성들만의 책임이 되는 것에 넌더리가 난다.

진정한 실패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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