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낯선 시선 - 메타젠더로 본 세상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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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선생님의 글은 내가 문제점이라고 여겼지만, 귀찮아서 어려워서 더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던 일들에 대해 속시원할 정도로 알기 쉽게 설명해주시고 또 그 안에 유머까지 담겨있다. 

저는 인문학이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 가는 공부라고 생각하거든요. 내가 누구인지 고민할 때, 자신의 성별을 모르고 가능할까요? 여성주의는 성별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해 인간과 사회를 공부합니다. 아, 참 그리고, 이게 가장 잘못 알려진 건데요. 인간을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하는 사고방식은 여성주의가 아니라 가부장제입니다.

메타 인지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능력이다

여성으로 상징되는 사회적 약자의 시선에 대한 나의 탐구이나 나 자신에 대한 심문, 이것이 나의 글쓰기 방식이기 때문이다.

지식은 가르치는(‘주입‘)것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경합의 과정이다. 다양성은 나열된 지식이 아니라 사유의 조건이다.

정치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공유하는 일이다. 소신과 정의감을 담은 발언은 정치인의 존재 이유다.

가정 폭력 상담을 하다 보면 남성은 열 대를 때려야 폭력 남편으로 인식되는데, 여성의 정당방위는 단 한 대도 폭력으로 간주된다.

폭력에는 여러 개념이 있지만, 내 생각 중 하나는 ‘감정을 제도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의 폭력들로 사회가 굴러간다. 가족주의, 민족주의, 지역주위, 동창회, 해병대, 향우회...... 이들 조직의 공통점은 한 가지. 선천적이든 개인의 선택이든 한 번의 경험, 소속을 평생 자신의 본질로 정의하고 운명을 좌우한다고 믿게 한다는 점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몸을 기준으로 분류된 타자다. 남성의 몸과 다르다는 것이 여성 억압의 근거과 되는 성차별 사회에서, 여성의 존재성은 몸으로 환원된다. 남성 몸과의 차이가 여성의 존재 ‘의의‘가 되기 때문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몸의 경험을 근거로 형성되는 여성의 정체성은 남성 중심 사회가 ‘부여‘한 것이지만, 남성은 행위하는 주체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한다. 그러므로 남성은 몸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그들의 정체성은 몸의 기능과 상태(나이나 외모)가 아니라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에 의해 형성된다.

인간관계에서 불성실과 딴청처럼 효과적인 억압은 없다. 상대가 스스로 미치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가 기존의 언어를 독점한 이들이 더 크게 떠들기 위한 구실이 아니라면, 근본적인 문제는 표현의 자유 보장이 아니다. 표현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질문하는 것. 이것이 표현이 자유의 전제다.

저항해서 자존감이 회복되거나 실질적 보상을 받는 경우는 드물다. 저항 과정의 사소한 문제가 가해의 본질보다 더 문제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몸은 낯선 행복보다 익숙한 불행을 더 좋아한다. 익숙함은 인간사의 대표적 부정의다. 적응(중독)된 몸은 삶의 방식이나 양식(糧食)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기 위치를 모르는 사람처럼 독을 뿜는 존재는 없다. 다른 말로 하면, 말하는 자기에 대한 인식 능력이 전혀 없이 때문에 누구에게나 아무 말이나 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주체가 되는 방식은 소비와 외모 관리 분야이다.

필요하지만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을 뜻하는 용어, ‘필요악‘. 인식과 문법 면에서 모두 틀린 표현인데, 사회는 이 말을 좋아한다. 불의와 불평등을 손쉽게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원전, 성매매, 누가 군대에 갈 것인가 같은 문제가 대표적인 예다. 일상에서 가장 만연한 필요악 논리는 아마 성매매일 것이다. 성매매는 필요악이다? 누구의 입장에서 필요하고, 누구의 입장에서 악이란 말인가. 필요도 악도 모두 남성의 시각이다. 악은 악일 뿐이다. 사회 문화적으로 제도화하면서까지 유지해야 할 ‘필요한 악‘은 없다.

전쟁과 평화는 국가 간 갈등이 기준이다. 하지만 어느 사회에서나 국내에서는 매일매일이 ‘사는게 전쟁‘ 혹은 실제 전시 상태인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쓸모없는 사람(잉여)‘으로 모욕과 궁핍 속에 사는 이들도 숱하다. 일상이 곧 정치적 사건인 장애인, 여성, 동성애자의 삶은 전쟁과 평화의 구분을 근본적으로 질문한다. 아내에 대한 폭력, 인신매매, 혐오 범죄 등 생사의 갈림길에서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겐 전쟁 전후가 있을 뿐이다.

닿을 수 없는 것. 존재하지 않는 시간인 미래를 위해 현재의 삶을 유예하는 것은 근대 인간의 가장 큰 비극이다. 그리고 우리 청소년들은 이 비극의 상징적인, 동시에 실질적인 볼모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몸과 남성의 몸은 작가의 의도를 떠나 사회적 의미가 전혀 다르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벗은 몸은 성별 중립적이지 않다. 남성에게 여성의 나체는 쾌락이다. 남성들은 돈을 주고 여성의 몸을 구매한다. 그러나 여성의 경험은 다르다. 남성의 성기 노출이 범죄인 이유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성과 사랑은 남성에게는 프라이버시지만 여성에게는 생존, 자아 개념, 시민권의 문제다.

여성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댜앙한 사회적 정체성과 역할을 하며 살아가는데, 여성의 행동은 성별만으로 환원되는 경우가 많다.

탁월한 여성 정신분석학자 카렌 호나이는, 여성의 사회 진출에 가장 방해되는 구조는 여성 간의 갈등을 ‘시기심‘으로 명명하는 사회라고 분석한 바 있다.

성차별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은 여성이 존재를 시민, 노동자, 지식인, 공무원 등 그들이 직접 수행하고 있는 다양한 역할이 아니라 ‘여성‘과 ‘여성의 성 역할‘로만 제한하는 규범과 제도이다. 그래서 작가에 대한 독자의 언급은 시기심으로, 대학생들의 국정 비판은 여성 대통령 개인에 대한 적대감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성매매는 성별, 성차별 제도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결정권이 아니라 여성 인권 문제다. 성(몸)매매가 왜 불법인가? 누구나 노동과 임금을 교환해서 먹고산다. 남녀가 같은 일에 종사해도, 여성이 ‘더 파는 것‘처럼 보이는 성차별이 있을 뿐이다. 손발, 머리 등 몸의 어느 부분을 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어떤 이들은 ‘지식인‘이고, 어떤 이들은 ‘노가다‘로 분류된다. 거듭 강조하는 바, 성매매는 매매가 아니라 성별이 문제다.

성매매 제도는 여성 전반을 성적 낙인 속에 가둘 수 있는 여성 혐오의 시작이다. 왜 이 직종은 자영업이 힘든가. 왜 인신매매가 흔한가. 왜 기술이나 지식, 근무 연수가 아니라 나이가 소득을 좌우하는가. 성매매는 자기 결정권과 무관하다. 남녀의 성에 대한 이중 잣대에서 출발하는, 인권의 보편성에 대한 가장 오래된 질문이다.

거칠게 요약하면, 현재 여성 ‘지위 상승‘의 실제 내용은 극소수 여성의 성취일 뿐이고, 공사 영역 모두에서 여성의 ‘역할(노동)증대를 의미한다. 여성의 사회 진출만큼 남성의 가사 노동 시간이 증가하지 않았으므로 여성 ‘지위 상승‘은 여성의 이중 노동일 가능성이 크다. 특히 남성들 간의 계급 차이에 대한 일부 남성의 분노가 ‘커리어우먼‘에게 전가된 것이다.

여성을 상품으로 상정하고 남성 사이에서 여성을 교환하는 것이 성매매의 기본 구조다.

주체의 자유와 휴머니즘은, 타자의 노동과 그 노동이 비가시화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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