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디아스포라의 눈
서경식 지음, 한승동 옮김 / 한겨레출판 / 2013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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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선생님의 책은 서양미술순례기를 통해 처음 접했다. 서경식님의 책에는 소수자의 예민하고 예리한 시각을 명확한 언어로 표현하는 내용이 담겨있어 읽으면서 쾌감이 느껴진다. 그 내용은 비록 아무리 비관적일지라도 말이다.

잠깐 낮에 잠이 들었다가 꾼 꿈을 쓴 장에서는 이분이 한국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수 있었다. 자신의 두 형에게 부당한 죄를 뒤집어 쓰게 하고, 자신은 그 두 형의 인생으로 인해 고생하였지만, 한국에 대한 관심을 넘어서 박해당하고 힘든 상황에 처한 모든 소수자와 연대할 수 있는 힘을 길렀다. 

태평양전쟁의 A급 전범인 도조 히데키가 일본인이었다고 해서 일본인 모두가 도조 히데키인 건 아니다. 하지만 침략 전쟁과 식민 지배라는 과거를 정당화하려는 우파 정권을 지금까지 존립시키고 있는 일본 국민에겐 ‘국민으로서의 책임‘이 있다.

인류는 왜 대량학살을 불사할 정도로 가혹한 전쟁을 벌이게 된 것일까. 그것은 언어의 출현과 토지의 소유, 그리고 죽은 이와 연관된새로운 아이덴티티의 창출로 가능해졌다고 나는 생각한다. 결국 "국가와 민족이라는 환상의 공동체가 사람들 마음에 깃들게 된 결과"라는 것이다.

자이니치란 일본인이 만들어낸 ‘타자 표상‘이지만, 그 표상은 일본인을 위협하고 난처하게 만들며 결속시켜 스스로가 일본인이라는 것을 재확인 시킨다. 말하자면 일본인은 자이니치를 만듦으로써 자기 자신을 만드는 것이다.

재일조선인은 일본의 식민 지배 때문에 일본에 살게 됐지만, 1947년 외국인등록령이 발령되면서 일방적으로 외국인등록을 강요당했다.

우리학교 학생들이 보여주는 순수함은 오랜 세월의 억압과 고립이라는 상황 속에서 부당한 외압으로 강제된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들 재일조선인은 식민 지배와 민족 분단의 아픔이 아직 계속되고 있다는 걸 잊지 말도록 상기시키는 ‘과거의 망령‘이다. 그 책임을 최후까지 지고 싶다.

미술관을 떠날 때 주차장 구석 풀밭에 있는 비석 하나가 눈에 띄었다. 미술관 관계자에게 물어보니 1923년 간토 대지진 때 이곳에서도 조선인 학살 사건이 일어났고, 그것을 기억하며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말자는 뜻에서 세운 것이라고 한다. 나는 또 물어봤다. "현이나 시에서 세운 겁니까?" 직원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니요. 마루키 부부가 사비를 들여 세운 겁니다. 마을 사람들은 어두운 과거를 들쑤시지 말라며 반발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비석도 마루키 부부가 ‘공기‘에 맞서며 세운 것이었다.

그들의 ‘평화주의‘는 실제로는 미일 안보조약 우산 아래 있고, 부담을 오키나와에 떠넘기는 구조 위에 서 있는 것으로, 스스로의 의자와 싸움을 통해 쟁취한 것이 아니다.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대다수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조선적‘이라는 건 ‘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적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1947년에 일본 정부가 외국인등록령을 발포하고, 당시는 아직 일본 국적을 보유했던 조선 사람들을 ‘외국인‘으로 간주하면서 등록하게 했을 때 편의적으로 사용한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일본 정부의 공식 견해이기도 하다). 그 시점에는 아직 조선반도 남북에 국가가 수립돼 있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적‘은 ‘무국적‘이라는 얘기고, 패전 뒤에 일본이 식민 지배의 정당한 청산을 회피하고 조선인을 난민으로 내몬 결과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을 ‘북‘의 국적으로 간주함으로써 당연한 듯 갖가지 규제를 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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