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는 깨달음에서 온다. 이 위로가 몸에 습관이 되어 독서의 즐거움에 중독되면 다른 일에는 흥미가 떨어진다 - P8
내 글이 어렵다는 불평과 비판 세례를 받을 때, "쉬운 글은 익숙한 글일 뿐"이라는 스피박의 통찰은 나를 자유롭게 해준다. "우리가 비판받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역사를 채우겠는가."라고 한 나혜석은, 나를 나대로 살게 하는 용기를 준다. - P9
언어는 본질적으로 권력 지향적이다....자유주의적, 기능주의적 사고 체계에서는 입장, 관점, 시각 같은 개념 자체를 부정하고 중립성과 객관성을 지향한다. 이런 탈정치적 주장이 가장 정치적인 법이다. 게다가 정치성을 표방하는 경우보다 정치적 효과도 크다. - P27
인간관계에서 ‘갑‘은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 잃을 것이 없는 사람, 덜 사랑하는 사람일지 모르지만 권력이 두려워하는 인간은 분명하다. 세상이 넓다는 것,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이다. - P33
분노와 평화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뜻이 없다. 누구의 분노, 누구의 평화인가가 의미를 결정한다. 따라서 나는 용서가 저주보다 바람직한 가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해자의 권력은 자기 회개와 피해자의 용서를 같은 의무로 간주하는데서 부터 시작된다. - P61
우리 사회에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암묵적으로든 노골적으로든 용서를 강요하는 상황은 낯선 일이 아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대표적인 예다. ... 분노, 고통, 복수에 비해 용서, 화해, 평화는 우월한 가치로 간주된다. ... 고통은 감정의 물질이다. 달리 해석될지라도, 크기가 작아질지라도,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몸에 있다. 가해자의 몸은 고통 경험이 없으므로 온갖 절대자의 이름으로 자기 마음대로 구원, 용서, 평화라는 관념의 향연을 주관할 수 있다. 초월(超越 dis/embodiment)은 득도가 아니다. 경험 없는 몸은 현실과 무관하므로 구원도 마음의 평화도 쉽다. - P64
분노는 개인의 마음 상태가 아니라 구조적 권력 관계다. 마음으로 다스릴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피해자의 분노는 관리나 통제의 대상이 아니다. 불가능에 가까운 타인에 대한 헤아림, 깊이 있는 지성의 영역에 놓여져야 한다. 나는 용서와 평화를 당연시하는 사회에 두려움을 느낀다. 2차 폭력의 주된 작동 방식이기 때문이다. - P65
문학평론가 환현산의 표현대로, "우리의 삶이 아무리 비천해도 그 고통까지 마비시키지는 못한다." 고통이 아픈것이 아니라 마비된 고통이 불러올 고통이 끔찍한 것이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 P72
차별 경험을 말하는 사람은 듣는 사람을 배려한다. 그래서 경험한 자아와 말하는 자아는 분열된다. 또 분열되어야만 한다. 모든 말하기, 글쓰기가 협상인 이유다. 원래 이 자아 분열 개념은 나치 학살의 생존자들이 자기 경험을 믿어주지 않을 것을 걱정하여 자아를 조정하는 고통에서 발전했다. 지금은 모든 담론 행위에 공통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P83
내가 지지하는 평화는 이런 진술들과 통한다. "폭력, 나는 그것을 지성이라 부른다" (마틴 루서킹), "평화는 (여성성이 아니라) 여성이 주로 해왔던 돌봄 노동이 공적 영역의 가치로 전환될 때 가능하다."(사라 러딕), "열려 있다는 것은 항쟁을 배제하지 않는 것이며 폭력은 인간의 뛰어난 공존 양식이다."(사카이 나오키), "평화학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기존 학문 틀의 문화적인 폭력에서 벗어나는 것이다."(요한 갈퉁)
"태어나서, 죄송합니다."는 자학이 아니다. 인간은 ‘낳아지는‘것이지, 누구도 ‘태어나지‘ 않는다. 문법과 무관하게 탄생은 능동태일 수 없다. 자기 생명을 스스로 생산하는 사람이 있나? 우리는 동의 없이 태어났다. 살기 싫은 사람에게 이만큼 열받는 일도 없다. 의지로 가능한 것은 자살뿐이다. 처음 이 말을 접했을 때 놀랐다. ‘자기가 태어났고‘ 그래서 ‘죄송하다‘니.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에 죄송하다는 메시아적 죄책감. 이 어마어마한 자의식와 이를 따르지 못하는 자식. - P100
백번 양보해서 ‘생각하는 동물‘이면 뭐하나. 문제는 무엇을 생각하느냐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찰나를 사는 먼지다. - P108
어머니 숭배와 ‘창녀‘ 혐오는 모두 남성 사회의 판타지다. 섹슈얼리티를 기준으로 여성을 이분하여 시민권 박탈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남성은 ‘아버지와 남창‘, ‘곰과 여우‘로 구분되지 않는다. - P112
구조와 개별 남성이 변해야 하는데, 남성성으로 조직된 가족, 사회, 국가, 시민사회가 먼저 변할리 없다. - P147
관습은 정당성을 갖는다. 과거에 받아들여졌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권위를 갖는다 - P186
한국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는 적대하거나 논쟁하는 세력이 아니다. 정상적인 국가 건설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추구하되 방법이 다를 뿐이다. 공통점은 성 차별과 주류 지향이고, 차이는 ‘종북‘이라는 기이한 용어에서 보듯 제대로 된 국가을 만드는 일에 통일을 포함하는가 여부와 그 방식일 것이다. - P206
민족이 성찰과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피해의 기억으로만 한정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누가 이득을 볼까. 나는 한국이 일본에게 좀 무관심하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가해자는 뻔뻔한데 한쪽의 지나친 ‘피해의식‘은 좌절, 절망, 원한을 순환하는 나르시시즘으로 추락하기 쉽다. - P310
평화는 평화로운 상태여서는 안 된다. 공동체의 문제가 공유되고 약자의 고통이 가시화, 공감, 분담되는 ‘시끄러운‘ 상황이 평화다. 지원병제는 특수한 경험을 한 사람들을 격리시키고 조용한 무관심을 조성한다. 징병제보다 무서운 것은 그것이다. - P321
평화에 대한 욕망은 반反평화적이다. 평화를 둘러싼 경합이 평화다. ‘모든 이(平)가 사이좋은 상태(和)‘는 존재할 수 없다. 이 불가능한 상태를 약자가 인내함으로써 가능한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 평화다. 강자의 양보로 평화가 실현된 경우는 없다. 양보했더라도 그것은 정의이지, 관용이나 배려가 아니다. - P331
평화는 가장 당파적인 개념인데 보편적인 가치처럼 인식된다. 일단,‘평(平)‘자체가 일반화의 폭력을 뜻하는 글자다. 평등도 마찬가지. 평등 실현보다 더 중요한 것은 평등의 기준이다. - P328
지구상 인구가 70억 명이라면 70억 개의 당파성이 있지만, 대개 사람들은 객관성으로 간주되는 강자의 당파성과 동일시하며 살아간다. - P339
기성 정치(인)에 대한 혐오와 무관심은 일종의 집단 우울증 현상이다. 암의 증상이 암 자체가 아닌 것처럼, 우울증의 주요 증상은 우울이라기보다는 기운 없음과 인간 혐오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약물과 사랑이라는 ‘영적인 치료(상담 요법)‘를 병행한다. 사람에 대한 신뢰 회복이 몸을 낫게 하는 것이다. - P343
사상가는 그 자신이 사유의 도구이며, 개인의 감정은 연구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대개는 약점이라 생각하지만, 나는 ‘자서전과 과학의 뒤엉킴‘이 정신분석의 가장 큰 힘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지식은 결국은 한 개인의 이야기다. 백인 중산층 남성의 경험이 보편적 이론으로 여거진 것은 권력의 작동 때문이다. 그들의 이론이 역사가 아니라, 그들의 이론이 역사가 된 과정이 익셔다. - P349
우리가 무엇에 대해 말하는 것은 대상에 대한 순수한 보고가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 태도, 입장을 드러내는 행위다. (투사!) 모든 발화는 객관적일 수 없다. 지식은 인식자의 렌즈를 통해 우리 앞에 재현(‘再‘現)된 것이다. 공부는 지식을 습득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인식자가 자기에 대해 아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을 사회와 공유하는 것이다. - P350
도그마, 관점, 당파성은 사유의 본질적인 속성이지 결함이 아니다. 이를 부정적으로 여기고 종합과 객관화를 위해 노력을 하는 것은 무지의 결과다. 지성의 반대말은 절충, 균형, 원칙...... 이런 사고들이다. 정론(正論)은 정론(定論)이 아니라 정론(政論)이다. 정론은 당위가 아니라 경합과 갈등으로 획득하는 가치다. - P355
약자의 대응은 두 가지다. 하나는 객관을 향한 욕망을 접고 자기 입장을 더 깊이 있게 전개하면서 "그렇게 말하는 당신 입장은 뭐냐?"라고 질문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들 뜻대로 균형 감각과 중도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물론 불가능하다. 균형의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언어의 세계에 중립이란 없기 때문이다. 객관성은 권력자의 주관성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익명성은 가자 무서운 서명이고 객관성은 가장 강력한 편파성이다. - P357
여성주의는 ‘전쟁과 평화‘가 국가 주권 단위를 기준으로 한 것이며, 사회적 약자의 일상과 무관한 구별이라고 비판해 왔다. 폭력 피해 여성, 위험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성 산업 종사 여성, 인신매매를 당한 여성, 난민 여성은 사는 게 전쟁이다. 베냐민의 테제가 바로 이것이다. 고통받는 사람에겐 인생의 시시각각이 비상이고, 민중의 고통으로 품위를 유지하는 지배자의 입장에서는 민중의 각성이 비상이다. ‘베냐민과 우리‘는 진정한 비상 사태, 즉 억눌린 자를 위한 봉기를 일으켜야 하는데, 지배자와 역사관을 공유한 진보 진영이 이를 가로막고 있다. - P360
여성주의나 마르크스주의는 당파적이지만 인간 해방을 위한 ‘계몽‘이라는 점에서 보편적이다. 모든 사유는 경합하는 운동이지 그것을 독점할 자격이 있는 집단은 있을 수 없다. 당연히 남성 페미니스트는 가능하고 또 절실하게 필요하다. - P440
여자는 자기를 잘 아냐고? 인종 차별 사회에서 유색 인종은 자기 처지를 알지 못하면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말로 답을 대신하겠다. - P443
무지는 약자를 무시하는 권력에서 나온다. 자신을 ‘남성‘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여성‘과 ‘흑인‘의 목소리를 공부하지 않는다. 주체가 타자를 모르면 자기를 알 수 없다. 간단한 이치다. - P445
몸은 자원이 아니라 행위자다. 그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몸은 교환, 사용, 묘사당하는 객체가 아니라 사고와 생활을 체현하는 사람 자체다. 몸은 사회이며 정신(mindful body)이다. 몸에 대해 쓰는 것은 인물을 쓰는 것이고 인생에 대해 쓰는 것이다. - P467
여성주의 심리학에서는 분노를 힘(empowering)으로 본다. 분노는 타인의 공감,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복수‘로만 ‘해결‘된다. ‘마음의 독‘인 화는 문명의 동력이기도 한다. 분노 조절보다 누구이 분노인가가 더 중요한 의제다. - P471
내 행동만이 나의 진정한 소유물이다. 나는 내 행동의 결과를 피할 길이 없다. 내 행동만이 내가 이 세상에 서 있는 토대다. - P473
이해(理解)는 읽는 이의 이해(利害)관계와 관련이 있다. 그러니 이해는 난이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영역이다. 이해의 영어표현(under/standing)이 좋다. 이해하려는 대상 아래 서 있으려는 겸손한 마음, 이것이 첫 번째 자세다. 이해는 사랑과 지식을 아우른다. 사랑은 수용이다. 상대를 수용할 때 이해는 따라온다. - P509
전국 각지의 맛집을 소개하는 책들이 봇물을 이루지만, 음식을 만들고 처리하고 치우는 과정에서 노동의 구체성을 말한 책은 거의 없다. - P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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