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하기 위하여>
이른바 n번 방 사건으로 나라가 떠들썩했다. 주동자 '박사' 조주빈이 잡혀 뉴스마다 그(으...놈 자 붙이고 싶어...)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나왔다. 그에 대한 기사도 연일 보도되었다. 어떤 일을 했는지,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교우 관계는 어땠는지, 어떻게 이 일을 했고, 얼마나 악랄한지. 심지어 살인모의? 청부? 같은 것도 했다며? 어머나 어머나....
그러는 사이 잊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건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여성들의 삶이다. 얼마나 아픈 삶을 살고 있는지, 그들이 잃은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해하고 치료하고 방지하기 위한 노력은 미약하기만 했다. 나도 그랬다. 너무나 대하기 힘든 끔찍한 범죄라 저절로 고개가 돌려졌다. 그런데 이 책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 영화 프로파일링>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말을 읽고 문득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런 동영상을 보지 않는 많은 여성들도 이건 내 문제가 아니니까, 나는 이런 동영상에 노출될 리 없으니까, 나는 안전한 관계만 맺고 있으니까, 하면서 불법 동영상 문제는 그들만의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동영상을 보는 남성들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요...피해자들을 외면하는 것 자체가 가해 행위의 연장선상에 있을지도 모릅니다.(191쪽)
(이수정 교수, 이다혜 기자, 그리고 최세희 조영주 작가가 팟캐스트를 만들었고, 이 책도 만들었다.)
불편해도, 피하기만 하면 바뀌는 점은 없을 것이다. 불법 동영상 삭제에 대해 묻기 위해 피해자에게 연락했더니 자살한 경우가 많더라고 한다. 내가 눈을 감고 있는 동안에도, 일은 벌어지고 있다.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 영화 프로파일링>은 영화나 드라마 속 범죄를 통해 사회를 보는 또 하나의 눈을 뜨게 하는 책이다. 노동에 대한 댓가를 받을 뿐인 <기생충>의 기태 가족이 과연 '기생충'인가 에 대한 문제부터, 권위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편견 등을 다양하게 다루지만, 결국 가장 강력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영화나 드라마 속 여성과 아동청소년에 대한 성폭력이다. 존경하는 범죄 심리학자 이수정 교수와 씨네21 이다혜 기자가 진행하는 동명의 팟캐스트의 내용 중 일부를 정리한 책이기도 하다.
이수정 교수와 이다혜 기자는 영화 속 범죄의 피해자들에게 특히 주목한다. 그리고 범죄 피해를 막기 위한 '대책'에 대해 이야기 한다. 나는 이 책의 그런 점이 특히 좋았다.
'밤 늦게 다니지 마라, 옷 얌전히 입어라, 문단속 잘 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건 가해자의 논리다. 연쇄 살인마 유영철이 그랬다지. "여성들이 몸을 함부로 놀리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 가정 폭력이 있었다면 피해자가 '쉼터'로 가는 것이 아닌 가해자가 집을 떠나는 '퇴거 명령'이 내려져야 한다고 말한다.(내가 돈 벌어 산 돈인데, 니가 나가라!고 남자들이 길길이 뛸 것이 안봐도 비디오다)
가해자가 누구이며 왜 그랬는지에게 집중하는 대신, 피해자의 피해를 복구하는 데 더욱 힘을 쏟자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손을 잡고 힘을 모아야 한다고 말한다.
힘내세요. 상처는 극복하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장할 수 있는 기회도 얼마든지 있고요....그리고 응원합니다. 우리는 결국 연대하기 위해서 이 방송을 하고 있는 것이니까요.(이수정) 227쪽
<책을 통해 알게 된 것>
책을 읽는 내내 혈압이 분노로 치솟았다가, 공포로 곤두박질 쳤다가 했다. 범죄에 대해 내가 몰랐던 사실이 너무 많았다. 내가 책을 읽으며 새로 알게 된 것과 깊이 공감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35) (이수정) 가정 폭력 사건은 크게 두 가지 경로가 있습니다. 형사 사건으로 처리되든지 아니면 가정 보호 사건으로 분류되는 것입니다....가정 폭력으로 보기에 경미하다고 판단되면 가정 폭력 처벌법의 적용을 받는 가정 보호 사건이 되는데, 이 경우에는 '반의사 불벌죄'가 적용됩니다....어느 단계에서든 뒤늦게 마음이 변심하여 '남편을 용서해 주세요.'하면 아무리 피해자의 팔이 부러지고 응급실에 실려가도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어렵습니다.
38)(이수정) 친족에 대한 범죄 통계는 산출되지만 그것을 세분화하여 부부 간에 얼마나 폭력이 일어나는지는 현재로서는 산출할 수 없습니다. 애당초 입력 자체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55) (이수정) 가정 보호 사건이나 아동 보호 사건으로 분류돼 가정 법원으로 넘어가면 그것으로 끝, 즉 형사 처분을 할 수 없습니다. 형사 처분까지 결정할 수 있는 전담 법원이 있다면 판사가 마음이 바뀌어 형사 처분을 할 수도 있고, 교도소에 갈 수도 있으니 폭력 가해자들의 경각심이 다르겠지요.
69) (이다혜) ...가정 폭력으로 인해 남편 손에 아내가 사망하는 경우가 일 년에 칠팔십명인데, 그중에 살인죄가 적용되는 경우는 20~30건밖에 안되고 나머지는 전부 과실 치사 판정을 받습니다....반복적으로 폭행을 저질러 온 사람의 살인의 고의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맞아 온 사람이 반격하는 순간에만 그 고의를 인정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됩니다.
136)(이수정) 이 부분은 우리도 법률을 개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성폭력 사건이 일어난 학교에 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부모는 학교가 아이들의 안전을 도모할 것을 예상하고 보낸 것인 만큼 아이가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면 학교를 상대로 손해 배상 청구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170)(이수정) 스토킹 방지법이 입법이 안 되고 있는 것이야말고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입니다. 남자들, 특히 나이 든 국회 의원은 스토킹을 정의하기가 애매하다는 이유로 입법에 소극적입니다....그런데 그런 논쟁 자체가 참 우습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요즘은 사방 천지에 CCTV가 있어서....그런 식으로 증거를 잡아 처벌하면 되는 겁니다. 스토킹이 구애 행위다 아니다를 가지고 탁상공론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193)(이수정) 리벤지 포르노도 사실은 포르노가 아니죠. 상업화된 것만 포르노라 부를 수 있는 것인데, 분명한 불법 동영상을 포르노라고 부를는데다 그 앞에 리벤지라는 말까지 붙여 버림으로써 사실을 왜곡해 버립니다.
197) (이수정) 영국도 아동 유인 방지법이 있습니다. ...성매매 업소를 차리고 13세부터 18세까지 가출 청소년들은 연락하라고 본인의휴대폰 번호를 인터넷에 올려놓는 행위가 불법인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은 그 댓글만으로는 처벌할 수 없습니다.
263) 범죄학에는 여성 범죄자를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악녀 가설'이 있습니다. 보통 피의자가 여자라면 경미한 폭력 범죄의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남자보다 관대한 처분을 내리는데 여자가 고의적으로 사람을 죽이면 여자가 감히 사람을 죽이다니! 하며 남자보다 형량이 훨씬 높아진다는 거죠.
294)(이수정) 사랑이라는 확신을 가질 정도로 완벽하게 상대를 현혹시키는 것, 바로 그런 것들을 마치 동물이 털을 다듬는 것과 같아 '그루밍'이라고 합니다. 그런 종류의 길들이는 과정 주에 피해자는 자신이 당한 것을 피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발적인 사랑이라 오해합니다.
301)(이다혜) ...사회적 인식에 따라 법은 바뀌게 마련인데 아직 인식 수준이 거기까지 도달하지 못해서 그렇지 소아 성애도 동성애처럼 언젠가 합법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성적 취향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수정) 이 주장은 아동도 어른처럼 성적인 반응을 할 수 있다는 오해에서 출발합니다. 아이들에게도 물론 성적인 욕구와 쾌락이 있지만 2차 성징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성인과 똑같은 수준의 성적인 쾌락을 느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고통을 주지요....자신에게는 성적 취향에 불과할 지 모르지만 상대방에게는 그야말로 폭력이고 고통스러운 피해입니다....이런 점이 아동 음란물, 아동 포르노가 나쁜 이유입니다.
303) (이수정) 성범죄는 남성 호르몬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권력과 통제력에 대한 욕망 때문에 일어납니다.
318) (이수정) 그런데 이런 청소년 집단 폭행 사건들의 배후에는 랜덤 채팅 앱이 있습니다. 앱은 전부 중소 IT 기업에서 만듭니다....그런 앱들이 한국에 현재 200개가 넘습니다. 업체도, 사용자도, 일반인들도 이 앱이 아동 청소년 성매매를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알지만 아무도 단속하지 않습니다.
321)(이수정)토론회에서 변호사 한 분이 혼인 가능 연령은 18세로 해 놓고 의제 강간 연령은 12세까지라는 것은, 그렇게 어린 나이부터 섹스할 능력은 있지만 혼인은 안 된다는 뜻이냐 지적하셨는데 너무나 합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345)(이수정) 특히 피해자와 가해자가 아는 사이고 가족이거나 위계 관게에 있는 사람일 경우 피해자의 반응이 '전형성'과는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안희정 전 도지사의 수행 비서였던 여성이 피해를 당한 다음 날 된장찌개를 먹을지, 순두부찌개를 먹을지 고민한 것은 피해자가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위치와 가해자와의 위계 관계에서 벗어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피해자가 저렇게 행동하니까 피해를 당한 것일리 없다고 판단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355)(이수정) 강간은 피해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해자를 주목하는 태도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자기 절제를 못하는 가해자의 욕망이 문제지, 피해자가 어떻게 생겼느냐, 피해자가 어떤 특성을 가졌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화성 연쇄 살인 사건의 중요한 시사점 중 하나가 피해자의 연령 폭이 8세부터 76세까지로 엄청나게 넓다는 사실입니다. ...성범죄는 야심한 밤에만 일어날 것이라는 추측도 틀립니다. 아동 성범죄는 방과 후에 제일 많이 일어납니다.
368)(이수정) 미국에서는 16세 미만의 경우 아무리 합의된 성관계라 해도 성폭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복적으로 강간을 당한다'라는 표현이 성립됩니다. 하지만 한국은 의제 강간 연령에 의거해 만 12세까지만 보호를 하다 보니 13세부터는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성매매 청소년으로 처벌받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374)(이수정) 강남 경찰서에서 그 치과 의사가 가지고 있던 아동 음란물을 압수했는데, 무려 6000건에 달했습니다. ...이 사건은 치과 의사의 주거지가 일정하고, 치과를 계속 영업하고 있고, 이미 음란물을 다 회수했기 때문에 증거 인멸의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구속 영장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정 기간 후에 다시 구속 영장을 청구하니까 법원에서 괘씸하다, 불구속 수사를 해도 되는 사안인데 자꾸 구속 영장 청구를 한다며 압수했던 6000건의 동영상을 그 피의자한테 돌려주라고 했습니다....그래서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이, 그 음란물이 증발했어요. 치과 의사가 동생에게 6000건의 증거물 동영상을 넘겼는데 찾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 안에 심지어 주요 아동 피해자들이 등장할 지도 모르는 위험이 있는데 말입니다.
<우리 아이가 살아갈 세상>
책을 다 읽고 책에서 소개한 넷플릭스 드라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보았다. 그 중 한 장면이 눈에 밟힌다. 주인공 듀발 형사는 연쇄 강간 사건의 증거를 찾기 위해 집에서도 밤 늦게까지 거실 소파에서 일한다. 딸이 자다가 깨서 나와 '무섭다' 고 하자 일하는 자신 옆에 재운다. 그리고 딸의 잠든 얼굴을 복잡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나도 책을 덮고 PC를 들여다보고 있는 딸의 옆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저는 제가 여자가 아니었으면 이 바닥에서 이런 연구를 하며 살지 않았을 것 같아요. 여자였기 때문에 피해자가 당한 고통에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었고, 그래서 이 일을 깊게 해 봐야겠다 생각했습니다....내가 이 일을 함으로써 내 딸이 안전하게 사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이수정) 201쪽
지난 선거에서 가장 반가웠던 점 중의 하나가 여성 후보들과 당선자가 눈에 많이 띄었다는 점이다. 물론 모든 여성 정치인이 여성의 복지를 위해서 일하지는 않는다. 어린이와 (대부분의) 청소년은 선거권도 없다. 다음 국회에서 우리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 몇 년째 법사위에도 못 올라가고 있다는 '스토킹 방지법'이 통과될까? 이수정 교수가 가장 큰 문제로 삼고 있는 '의제 강간 연령'이 높아질까? 아동 유인 방지법이 통과될까? 희망을 가져본다.
끔찍한 사건에 대한 보도를 접하며,
'그것이 알고싶다'를 보며,
범죄 영화를 보며 느끼고 가져야 하는 것은
'이렇게 험한 세상에도 우리집은, 나는 안전하구나' 하는 안도와 감사가 아닐 것이다.
불안과 불만, 그리고 문제를 직시하고 행동하려는 용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