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현실은 꿈의 배설물일 뿐이야 (1)
|
|
|
|
신화란 본질적으로 무한하면서도 객관적 현상에 있어서는 유한할 수밖에 없는 어중간한 존재로서의 모순적인 인간 상태를 비애를 담아 표현한 것이다.
- 폴 리쾨르
|
|
|
|
|
가끔 미치도록 바다가 보고 싶을 때, 지금 당장 여행을 떠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을 때, 평소엔 전혀 종교생활을 하지 않다가도 갑자기 아무 신의 옷자락이라도 붙들고 간절히 기도를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유모차를 타고 지나가며 까르륵 웃는 아이가 정말 살아 있는 천사처럼 보일 때, 엄마의 눈가에 자글자글한 주름에서 할머니와 엄마와 나의 3대를 넘어 우리가 진화해온 지긋한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질 때, 오늘 따라 매일 보는 친구나 연인의 얼굴이 불현듯 ‘여신 포스’를 풍기며 아름답게 빛나 보일 때.
우리는 그럴 때 저마다의 무한한 시간, 저마다의 신화적 시간을 갈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철학자 폴 리쾨르는 인간이란 유한성과 무한성의 두 기둥 사이에 가냘프게 매달려 있는 나약하기 그지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성’의 세계와 ‘속’의 세계 사이에서 흔들리며 분열되는 존재, ‘성’과 ‘속’의 이상적인 통합을 추구하지만 매번 실패하는 존재.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유한한 시간의 화살표에 쫓겨 다니며 보내지만, 문득문득 정해진 스케줄의 중력 바깥으로 뛰쳐나가는 ‘신화적 시간’의 내밀한 원심력을 느끼곤 한다.
<매트릭스>의 네오에게는 이제 ‘신화적 시간의 모험을 떠날 것인가, 세속의 시간에 머물 것인가’ 하는 절박한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 모피어스는 빨간 알약과 파란 알약을 각각 보여주면서 각각의 의미를 설명해준다. 빨간 약은 신성한 모험의 시간을, 파란 약은 세속의 시간에 머물기를 의미한다.
모피어스 : 네오. 네가 여기 온 이유를 말해 주지. 넌 스스로 이미 뭔가를 알기 때문에 온 거야. 그게 뭔지 설명은 못 해. 하지만 뭔가가 느껴졌을 거야. 넌 그걸 평생 동안 느껴왔어. 뭔지는 모르지만 세상이 잘못됐다는 걸 말이야. 그 생각 때문에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고 자넨 미칠 지경이었겠지. 그 느낌에 이끌려 온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나?
네오 : 매트릭스를 말하는 건가요?
모피어스 : 그게 뭔지 알고 싶나? 매트릭스는 사방에 있어. 바로 이 방 안에도 있고 창밖을 내다봐도 있고 TV 안에도 있지. 출근할 때도 느껴지고 교회에 갈 때도 세금을 낼 때도 진실을 못 보도록 눈을 가리는 세계란 말이지.
네오 : 무슨 진실이요?
모피어스 : 네가 노예라는 진실! 너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모든 감각이 마비된 채 감옥에서 태어났지. 네 마음의 감옥. 불행히도 매트릭스가 뭔지 말할 순 없어. 직접 봐야만 해. 이게 마지막 기회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어. 파란 약을 먹으면 여기서 모든 게 끝난다. 침대에서 깨어나 믿고 싶은 걸 믿게 돼. 빨간 약을 먹으면 여기 이상한 나라에 남아 끝까지 가게 된다.
네오는 스미스 일당에게 힘없이 잡혀갈 때보다는 훨씬 단단해진 눈빛으로, 이것은 정말 스스로의 선택이라는 굳은 표정으로 빨간 약을 삼킨다. 이제 모피어스의 알쏭달쏭한 수수께끼 같은 말의 의미가 밝혀질 차례다. 네오가 ‘1999년’으로만 알고 있었던 ‘현재’는 사실 ‘2199년’이었고, 그가 ‘자신의 몸’이라고 생각했던 육체는 사실 인공지능컴퓨터 AI(Artificial Intelligence)가 만들어낸 정교한 환상이었다. 인간들은 태어나자마자 AI들이 만들어낸 ‘인공 자궁’ 안에 갇혀 AI의 생명 연장을 위한 에너지로 사용되고, 뇌세포에 ‘매트릭스’라는 프로그램을 입력 당한다. 그 프로그램이 바로 네오가 지금까지 ‘현실’로 철석같이 믿어왔던 ‘1999년’이었던 것이다. 그가 살아온 현실은 매트릭스가 조종하는 꿈이었던 것이다.
인간이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항상 매트릭스의 검색 엔진에 노출되고, 인간의 기억 또한 매트릭스에 의해 자유자재로 입력되고 삭제된다. 맛있는 스테이크를 먹으며 황홀해 하는 기분마저 모두 ‘스테이크맛’이라는 황홀한 환상을 섭취하는 것이었다. 모피어스 일행은 이러한 끔찍한 매트릭스의 음모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기 위해 싸우는 전사들이었다. 스미스일당은 바로 그 매트릭스를 지키는 AI 통제 요원들이었고 모피어스 일행이 스미스일당의 삼엄한 검색망을 뚫고 매트릭스 안에 들어가 드디어 찾아낸 사람이 바로 ‘네오’였던 것이다.
네오는 비로소 기나긴 ‘꿈’에서 깨어나 매트릭스 바깥에서 ‘사육’되고 있는 인간의 비참한 몰골을 확인하게 된다. 그는 온몸에 구멍이 뚫린 채 매트릭스의 인큐베이터 안에서 사육 당하고 있었던 자신의 ‘진짜 육체’를 발견하고 경악한다. 네오 뿐 아니라 지구인 전체가 그런 처참한 몰골을 하고서 2199년의 현실은 전혀 모른 채 1999년을 ‘꿈꾸며’ 살아왔던 것이다. 이제 그는 매트릭스 속에서 ‘가상의 죽음’을 고통스럽게 경험하고 명실상부한 ‘네오’로 다시 태어난다. 이제 네오는 아직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진짜 육체’를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모피어스 : 이게 ‘컨스트럭트’다. 로딩 프로그램이지 뭐든지 로드할 수 있어 옷이든 장비든 무기든, 훈련 시뮬레이션이든 필요한 건 전부 다!
네오 : 우리가 지금 프로그램 안에 있는 거라고요?
모피어스 : 그렇게 믿기가 힘든가? 자네 옷도 바뀌었고 머리와 몸의 구멍도 없어졌잖아. 머리 모양도 달라지고. 지금 자네의 모습은 ‘잉여 자기 이미지’란 거야. 자신의 모습을 디지털화한 거지.
네오 : 그럼 진짜가 아닌가요?
모피어스 : 진짜가 뭔데? 정의를 어떻게 내려? 촉각이나 후각, 미각, 시각을 뜻하는 거라면 진짜란 두뇌가 해석하는 전자 신호에 불과해. 이게 자네가 아는 세상이야. 바로 20세기 말의 모습이지. 이젠 신경 상호작용 시뮬레이션의 일부인 매트릭스로만 존재하지.
|
|
|
|
시간은 인간을, 사회를, 코스모스를 닳게 하였다. (……) 세계가 순수하고 강력하며 거룩한 시간에 멱 감았던 저 신화적 순간을 재현하기 위해서 세속적 시간은 소멸되어야만 한다. 세속적인 지나간 시간의 폐기는 일종의 ’세계의 종말’을 나타내는 제의에 의하여 수행된다. 불의 사그라짐, 죽은 자들의 영혼의 복귀, (……) 사회적 혼란, 성적 방종, 광란 등등이 코스모스로부터 카오스에로의 퇴각을 상징한다.
- 엘리아데, 이동하 역, <성과 속>, 학민사, 1996, 70쪽.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