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본 아이덴티티>와 미셸 푸코 ⑫

 

12. 나를 지워야 내가 될 수 있다 (1)

   
 

한마디로, 푸코의 저작은 전부 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의 연장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영원하다고 믿는 모든 개념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변전된’ 것이며, 그 기원들에는 숭고한 것이 전혀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다.  


 - 폴 벤느, 이상길 역, <푸코, 사유와 인간>, 산책자, 2009, 173쪽.

 
   

   언제부터 사람들은 ‘신분증’이 없으면 중요한 일을 하나도 처리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일까. ‘내가 바로 나다’라는 것은 증명할 수 있는 서류가 필요해진 순간, 인간은 더욱 효과적으로 관리되고 통제되기 시작했다. 때로는 우리들 자신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소소한 과거의 행적들이 어디선가 관리되고 어디선가 보관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오싹해지는 순간이 있다. 이 모든 ‘근대적 정체성’의 관리 시스템이 진정한 효력을 발휘하게 된 것은 채 100년도 되지 않았다. 우리의 출생과 이사와 여행과 출산과 사망을 관리하는 주민등록의 절차에 의해 우리는 때로는 ‘세금을 내는 시민’으로, 때로는 각종 통계 수치의 머릿수를 채우는 ‘국민’으로 호출된다. 

    제이슨 본이 지우고 싶은 것은 바로 CIA산하 비밀요원 양성 프로그램 트레드스톤에 입력된 자신의 기록이었다. 그는 과거를 찾으려는 ‘단순한’ 희망이 결코 단순하지 않음을 깨닫고, 더 이상 자신의 과거를 찾아 떠나는 여행에 집착하지 않기로 한다. 이제 과거의 나를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완전히 사라지더라도, 지금-여기 내가 새롭게 시작하는 세상에서 내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한 여자와 살아갈 수만 있다면, 잃어버린 과거 따윈 되찾지 않아도 좋다. 마리를 찾아낸 제이슨은 하얀 셔츠를 입고 나타나 이제야 자신이 모든 어둠의 기억에서 ‘깨끗하게’ 해방된 듯한 가뿐한 표정을 짓는다.
    “멋진 가게군요, 찾아내기는 좀 힘들었지만……. 스쿠터를 하나 빌릴 수 있을까요?” 마리는 장난스런 표정으로, 반가워 미칠 것 같은 표정을 애써 억누르고 새침하게 대꾸한다. “신분증 있어요?” 제이슨은 이제 난 아무 것도 궁금하지 않다는 듯, 해맑게 웃으며 대답한다. “그런 것 없는데요.” 그들은 그렇게 모든 ‘신분증’을 지운 자리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그들만의 파라다이스를 시작하려 했다. 내 모든 것을 버리고 너에게 왔어. 이제 나는 내가 아니냐. 그러나 이제야말로 나는 진짜 내가 될 수 있어.   

   현대인은 자유의지의 힘을 믿도록 교육된다. 내 삶을 선택할 수 있다고, 내가 원하는 나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이 세상의 기회는 균등하다고. 하지만 어른이 되어갈수록 우리는 그 패기만만한 자유의지의 환상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된다. 우리가 결코 선택할 수 없는 것들로 인해(인종, 국적, 가족, 유전자 등 우리를 ‘규정’하는 모든 사회적 조건들) 우리의 선택은 철저히 제한받을 수밖에 없다. 내가 행동했다고 해서 모두 나의 욕망이었는가, 내가 선택한 것이 진정 나의 의지였는가, 그렇게 의심되는 상황들이 곳곳에서 발생한다. 우리의 모든 행동이 정말 자율적이고 자발적인가. 우리는 우리의 능력이 과연 어디에, 어떻게, 누구를 위해 쓰일지 진정 알고 있는가. 

   <본 슈프리머시>와 <본 얼티메이텀>에서 제이슨 본은 그렇게 ‘자유로운 나의 선택’이라는 것이 사실은 원천 봉쇄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과거는 그가 도망치거나 삭제할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꼭 제이슨 본처럼 무시무시한 비밀요원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삶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향력을 가늠할 수 없고, 우리 자신의 모든 행동의 기원을 밝힐 수 없으며, 우리가 ‘난 이제 자유롭다’고 생각했던 수많은 순간들이 사실은 장기간의 ‘무의식적 부자유’가 축적된 치밀한 과정의 결과였음을 깨닫곤 한다.
   <본 슈프리머시>와 <본 얼티메이텀>에서 제이슨은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살인자로 몰려 추격당하게 되고, 이제 스스로 저지르지 않은 행동까지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과거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고자 했던 그 숨 가쁜 여정 속에서, 자신을 추격하던 요원의 총격으로 의해 마리를 잃고 만다. 이제 그는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 때문에 죽었다는 끔찍한 죄책감까지 껴안고 살아가야 한다.

   마리를 눈앞에서 잃자 제이슨은 더 이상 숨어서만은 살 수 없게 된다. 이 모든 것을 시작한 사람들을 찾아내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먼저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다. 밤마다 꿈속에 나타나 나를 괴롭히는 환상. 내가 죽인 사람들. 내가 ‘처리’한 사람들의 끔찍한 환영들. 자신이 죽인 사람들에 대한,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한 속죄. <본 슈프리머시>에서 제이슨은 천신만고 끝에 자신의 첫번째 ‘임무대상’이었던 러시아 정치인 네스키의 딸을 찾아간다. 네스키의 딸은 엄마가 아버지를 직접 살해한 것이라는, 언론의 조작된 보도를 믿고 살아가고 있다. 부모를 한날한시에 잃은 것도 모자라 어머니가 아버지를 죽였다는 ‘기사’를 ‘사실’로 믿고 살아온 소녀가 이제는 어엿한 숙녀가 되어 제이슨 앞에 앉아 있다.

    소녀 : 난 돈도 없고 마약도 없어요. 원하는 게 그거 아닌가요?  
    제이슨 : (러시아어로) 좀 앉지. 그 의자에 앉아.  
    소녀 : 영어 할 줄 알아요.
    제이슨 : 난 널 해치지 않아. 겁낼 것 없어. 생각보다 많이 컸구나. 더 어릴 줄 알았는데. (자신이 죽인 네스키 부부의 사진을 가리키며) 저 사진, 너에게 소중한 거겠지?  
    소녀 :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다는 듯, 무심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별로요, 그냥 사진일 뿐이에요.
    제이슨 : 아니. 그건 네가 진실을 모르기 때문이야.
    소녀 : 알아요.
    제이슨 : 아니, 넌 몰라. 나라면, 알고 싶을 거야. 나라면, 엄마가 아버지를 죽이고 자살한 게 아니란 걸 알고 싶을 거야.
    소녀 : 네?
    제이슨 : 네 부모님은 그렇게 돌아가신 게 아니야……. 내가…… 죽였다. 내가 죽였어. 그게 내 임무였어. 내 첫 임무였지. 네 아버지가 혼자 있는 줄 알았어. 그런데 네 엄마가 갑자기 나타나셨지. 난 계획을 수정해야 했어.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모든 게 달라지지. 안 그래?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었는데…… 진실을 알아야지. 미안해…….  
   소녀 :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제이슨은 국경을 몇 번이나 넘고 넘어 온갖 정보기관들의 추격을 따돌리며 결국 자신의 과오가 시작된 맨 처음 그 자리로 찾아간다. 그는 마치 잘 훈련된 휴머노이드 로봇처럼 내가 왜 죽여야 되는지도 모르고 ‘주인’의 명령에 따라 암살대상을 처리하곤 했다. 그러나 그에게 기억상실증이라는 ‘시간의 단절’이 일어나자, 결국 그들의 교정 프로그램이 결코 바꾸지 못했던 한 인간의 내면의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을 만들어가는 ‘행동(doing)’보다 더 어려운 것은 그 모든 행적을 지우는 ‘원상복귀(undoing)’임을 알게 된다. 발설된 것은 철회될 수 없고, 시행된 것은 되돌릴 수 없다. 죽은 네스키 부부는 결코 살아날 수 없으니까. 그러나 속죄를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은 천지차이다. 적어도 네스키의 딸은 ‘엄마가 아빠를 죽이고 자살했다’는 끔찍한 오명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소녀는 엄마가 아빠를 죽이는 소름 끼치는 환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 얼티메이텀>에서 드디어 제이슨은 자신을 만든 권력의 실체와 정면승부하게 된다. 인간 병기 제조 기획 ‘트레드스톤’을 만든 사람들. 트레드스톤이 실패하자 ‘블랙 브라이어’라는 업그레이드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들. 그들은 제이슨 본처럼 ‘우수한 인간병기’를 만들어, 그들이 ‘애국’의 이름으로 자행하는 대단한 권력의 게임을 완수하기 위해, 영원히 역사에 기록되지 않을 ‘숨은 희생양’을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이 성공적인 인간병기들은 그들이 배운 기술을 단지 그들의 ‘상사’를 위해서만 쓰지는 않는다는 것을. 제이슨 본은 자신을 만든 바로 그 창조주들을 향해, 그들로부터 습득한 모든 지식과 능력과 기술을 실험한다. 그들이 살해대상을 제거하기 위해 가르친 프로그램은 정확히 그들의 조직 자체를 뒤흔드는 ‘역습의 무기’로 사용된다. 지식은 권력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식이 쓰이는 용법이다. <본 얼티메이텀>에서 비로소 제이슨 본은 자신을 인간병기로 만든 사람들로부터 배운 모든 지식을, 자신을 파괴한 바로 그들을 향해 눈부시게 휘두른다.    


   
 

 소송 절차는(……) 필연적으로 자백을 구하는 경향이 있다. (……) 피고인에 대하여 효과적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유일한 방식, 진실이 완전히 힘을 발휘하기 위한 유일한 방식이란, 범죄자가 자신의 범죄를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고, 증거 조사에 의해 교묘하면서 애매하게 조립된 사항에 서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악인이 정당하게 처벌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가능하다면 악인은 스스로를 재판하고, 스스로에게 유죄선고를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자백은 피고인 없이 행해지는 증거 조사를 자발적인 의사표현으로 변화시킨다. 자백에 의해서 피고인은 형사상의 진실을 생산하는 의식 속에 참여하게 된다. (……) 자백에 의해서 피고인은 소송 절차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고, 증거 조사에 의해 만들어진 진실에 자기 이름으로 서명하는 것이다. 
 

 - 미셸 푸코, 오생근 역, <감시와 처벌>, 나남출판, 2004, 74~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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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09-12-01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앗, 다행. 계속되는 군요^^* 서서히, 뭉클 상쾌한 결말이 기대됩니다.

friends 2009-12-02 0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본 시리즈가 피날레를 향해 달려가고 있군요. 본 얼티메이텀 뒤에 또 속편이 나와도 좋을 것 같은데. 본 시리즈는 첩보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감각적인 요소들이 많은 듯^^

둥이 2009-12-02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뭐야?내가 하는 모든 행동들(아니 생각들 아무튼 모든것!)이
다 내가 아닐수도 있다는?
나도 이 사회에서 훈련된 한 개체일 뿐인가?
어렵다 그래서 난 떠난다....

훈남 2009-12-04 00:00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동감이요. 어렵네요;;

니모 2009-12-02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둥이님, 저번에도 떠난다고 하시더니 또 오셨군요ㅋㅋㅋ

doingnow12 2009-12-03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얼른떠나세요 둥이님..크흣..
점점 나이가 들면서 느끼게 되는 세상과의 괴리감은 결국 배운것과 현실의 차이에서 오는 건가봐요..그래서 저는 오늘도 그 사이에 낑겨서 허우적대는가봅네다..흐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