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원령공주>와 가스통 바슐라르 ⑦

   

7. 아니무스의 눈물, 아니마의 미소 (1)

   
 
 나의 가치를 키우려면, 그대의 사랑을 더 키우라!
 Make thy love larger to enlarge my worth!
 - 엘리자벳 브라우닝
 
   
   
 

 몽상가의 몽상은 전 우주를 꿈꾸게 할 수 있다. 몽상가의 휴식은 물, 구름, 미풍을 쉬게 할 수 있다.  


 -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76~77쪽.

 
   
   
 

우리의 휴식의 원리인 아니마는 그 자체로 충족되는 우리 속의 본성이다. 그것은 조용한 여성성이다. 우리의 깊은 몽상의 원리인 아니마는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물’의 존재이다.  


 -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82~83쪽.

 
   


   아시타카가 원령공주의 극진한 간호를 받으며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시간. 그가 죽음과 삶의 경계 위에서 서성이던 그 시간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모든 일이 일어난 듯한, 치유와 몽상의 시간이었다. 아시타카를 치유한 세 가지 힘은 원령공주의 보살핌과 물의 치유력, 그리고 시시신의 치료(아시타카의 상처를 직접 핥아주던)였다. 아시타카는 자신을 이끌어오던 모든 존재의 중력으로부터 철저히 자유로워지는 휴식, 즉 여성적 휴식 속에서 부족을 잊고 운명을 잊고 저주를 잊는다. 걱정, 야심, 계획 등의 모든 ‘아니무스’적 고통을 떠나서 고요, 휴식, 치유, 돌봄의 세계에서 안식을 얻는 것이다.  

   아시타카는 연대기적 시간에서 도피함으로써 진정한 시간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는 부족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하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고민이 아니라, 이 세계 속에서 어떻게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갈 것인가 하는 우주적 몽상으로 한껏 비약한다. 그는 시계적 시간에서 벗어남으로써 통과의례의 가장 고통스러운 문턱을 통과하게 되고, 비로소 ‘나 아닌 나’와의 우주론적 만남을 시도한다. 원령공주의 세계는 아시타카에게 있어서 잃어버린 아니마, 억압된 아니마의 존재가 아닐까. 바슐라르는 <몽상의 시학>에서 우주적 몽상이란 인간이 자기 안에 잠자는 아니마와 만나는 극적 체험이라고 했다. 이 순간 가스통 바슐라르는 칼 구스타프 융과 만나 철학의 연금술을 시도한다. 

   
 

몽상가에게 지독한 혜택을 주는 몽상 속의 상상세계는 자기 아니마를 위해 이루어진다. 아니마는 언제나 단순하고 조용하고 계속적인 삶의 피난처이다. 그래서 융은 “나는 아니마를 단순히 삶의 원형라고 규정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지식을 찾지 아니하고 삶, 단순한 삶을 꿈꾸는 사람은 여성성으로 기운다. 아니마 주위로 집중하면서, 몽상은 몽상가가 휴식을 발견하는 것을 도와준다. 가장 좋은 우리의 몽상은, 남자건 여자건, 우리 저마다의 속에 있는 우리의 여성성에서 나온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게 여성성의 흔적을 갖고 있다. 우리 속에 여성적 존재가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쉴 수 있을까? 


 -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108쪽. 

 
   

   파괴하고 정복하고 소유하여 자신의 세계를 확장시키는 에보시가 ‘아니무스’의 힘을 상징한다면, 고요한 치유와 조건 없는 보살핌, 휴식과 안정을 꿈꾸게 하는 시시신은 ‘아니마’의 힘을 상징한다. 아시타카를 간호하는 동안만은 전사의 가면을 벗고 타인의 고통에 몰두하는 원령공주의 모습 또한 아니마의 저력을 보여준다. 아니마는 결코 나약한 여성성이나 남성에게 결핍된 여성성이 아니라, 생물학적 여성들 스스로도 끊임없이 자발적 연마와 성숙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본원적인 여성성이다. 시시신의 존재 방식은 아니마의 모든 요건을 갖추고 있다. 사경을 헤매는 아시타카를 치료하기 위해 시시신이 나타나는 순간. 그곳에는 시간의 흐름도 공간의 구획도 사라지는 듯 신비로운 아우라가 감돈다. 시시신의 발자국이 머무는 곳마다 이름 모를 꽃들과 싱그러운 풀들이 솟아오르고 한없이 평화로운 정적의 기운이 감돈다.
   인류가 주인의 위치에 머무는 한, 인류의 1인칭 시점으로 우주가 관찰되는 한, 우리는 ‘보호’라는 미명하에 자연을 재단하는 오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말 못하는 동물과 식물의 목소리를 들으려 애쓰는 원령공주는 동물들이나 식물들과 대화를 하는 데 굳이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언어 없이도 대화할 수 있는 원령공주는 자연과 인간 사이에 놓인 간극을 매개하는 몽상의 귀재, 샤먼의 모델인 셈이다.


   한편 아시타카가 깨어나는 순간 거대한 멧돼지들의 무리가 원령공주와 모로를 방문한다. 에보시의 손아귀에 곧 파괴당할 위기에 놓인 시시신의 숲을 지키려고 왔다는 멧돼지들, 그 커다란 무리를 이끄는 수장은 ‘옷코토누시’다. 원령공주의 ‘엄마’인 들개 모로. 모로는 낯선 인간 아시타카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는 옷코토누시에게 말한다. “시시신이 이 청년의 상처를 치료해줬어 그래서 안 죽이고 돌려보낸다.” 옷코토누시는 대경실색한다. “시시신이 인간을 구했다고? 인간은 살리면서 왜 ‘나고신’은 구해주지 않았나? 시시신은 숲의 수호신이지 않은가?”
   재앙신이 되어 아시타카의 마을을 공격한 거대한 멧돼지가 바로 ‘나고신’이었던 것이다. 모로는 동요하지 않고 조용히 타이른다. “시시신은 생명을 구하기도 하지만 빼앗기도 하지. 나고신은 죽는 걸 두려워한 거다. 지금의 나처럼……. 내 몸에도 인간의 총알이 박혀있다. 나고신은 달아났지만, 난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난 살만큼 살았다. 시시신은 내 목숨을 앗아갈 거다.” 삶뿐 아니라 죽음을 관장하는 일도 역시 ‘생명’의 신 시시신의 역할이었던 것이다. 삶을 통해 죽음을 준비하고, 죽음을 통해 삶을 일깨우는 것이야말로 생명의 영역이기에. 모로는 인간이 쏜 총탄을 몸에 지닌 채 죽음을 껴안고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견뎌내면서, 시시신의 존재를 더욱 가슴 깊이 느끼는 법을 터득한 셈이다.

   나고신의 억울한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옷코토누시는 모로에게 분노하며 멧돼지부족의 몰락을 시시신과 모로의 탓으로 돌린다. 분위기가 험악해지려는 순간, 아시타카는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며 고통스럽게 고백한다. “나고신을 죽인 건 나야. 나고신이 마을을 습격해서 어쩔 수 없이 죽였지. 그는 커다란 멧돼지 신이었어. 이것이 증거야(그는 점점 무섭게 번져가는 팔뚝의 흉터를 보여준다). 시시신을 만나 저주를 풀려고 여기 왔어. 시시신은 에보시 부족이 입힌 총상은 치료해줬지만 나고신이 남긴 저주의 멍은 없애지 않았지. 나는 이제 이 저주의 상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천천히 죽어갈 거야.” 옷코토누시는 아시타카의 진솔한 고백에 분노를 잠재우고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인 인간들에게 멧돼지 부족의 마지막 힘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한다. “이대로 간다면 우리는 인간의 사냥감밖에 안 돼. 모두 함께 덤비면 인간들한테 전멸당할 거야. 우리 일족이 멸망한다 해도 인간에게 힘을 보여주고 말 테다.”

   한편 에보시 부족이 제조해낸 엄청난 분량의 철을 탐내는 아사노 막부는 에보시로 하여금 ‘철의 절반’을 넘기라고 협박하고, ‘시시신’의 목을 노리는 사냥꾼 무리들이 국왕의 명령이라는 명목으로 숲을 침범한다. 에보시는 숲을 파괴하며 제철소를 운영하여 ‘시시신의 숲’과도 적대하게 되고, 철제 무기를 바탕으로 부를 축재함으로써 막부 세력과도 반목하게 된다. 에보시의 해법은 간단명료하다. 숲을 더욱 전면적으로 파괴하여 제철소의 자원을 확보하고 더 ‘강한 부족’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우리가 계속 철을 만들면 숲은 점점 약해질 것이다. 그럼 인명피해도 줄일 수 있어.” 에보시는 타타라 마을을 정복했듯이 시시신의 숲도 자신의 소유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뛰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숲을 적대적 자원으로 본다는 점에서, 땅을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우주적 몽상의 여백을 잃어버린 인간이다. 게다가 사냥꾼들은 시시신의 목을 잘라 오면 불로불사의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국왕의 왕명을 받아, 시시신의 목을 베기 위해 숲 속에서 잠복 중이다. 그들 또한 시시신의 목을 소유함으로써 숲 전체를 자신들의 영토로 흡수시키려 하는 셈이다. 이렇듯 소유의 집념, 스톡(stock)의 욕망은 인간의 창조적 몽상을 가로막는 가장 치명적인 장애물이 아닐까. 이제 숲을 소유하려는 에보시와 시시신의 목을 요구하는 국왕에 맞서, 죽음을 불사하고 숲을 지키려는 멧돼지들과 모로 일족의 결사항전이 시작된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변증법은 심층의 리듬에 따라 펼쳐진다. 그것은 덜 깊은 곳에서, 언제나 덜 깊은 곳(남성)에서, 언제나 깊은 곳, 언제나 더 깊은 곳(여성)으로 간다. 우리가 아주 풍요롭게 펼쳐진, 단순한 고요함 속에서 휴식하는 여성을 발견하는 것은 몽상, 앙리 보스꼬가 말하는, ‘숨어 있는 삶의 한없는 저장소 속’에서이다. 날이 새면 다시 태어나야 하기 때문에, 내적 존재의 시계는 남성으로-남자건 여자건 모든 사람에게 남성으로 종을 친다. 그러면 사회적 활동의 시간, 본질적으로 남성적인 활동의 시간이 되돌아온다. 감정적인 삶에서까지도, 남자나 여자는 저마다 자신의 이중의 힘을 이용할 줄 알고 있다. (……) 몽상가에게 조용한 고독을 되돌려주는 몽상 속에서는 남자건 여자건 인간은 ‘몽상의 비탈길’을 내려가면서, 언제나 내려가면서, 심층의 아니마 속에서 휴식을 발견한다. 추락이 없는 하강이다. 이 불확실한 심층에서는 여성적인 휴식이 지배한다. 이 여성적 휴식 속에서, 염려, 야심, 계획에서 떨어져, 우리는 구체적인 휴식, 우리의 전 존재를 쉬게 하는 휴식을 알아본다.  


 -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72~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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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finder 2009-11-02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의 가치를 키우려면 그대의 사랑을 더 키우라~ 멋진데요^^

맨손체조 2009-11-03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날이 새면 다시 직장으로 가서 자리보전에 대한 집념과 월급에 대한 집착으로 창조적 몽상을 할 시간도 없다ㅠㅠ

sotkfkd 2009-11-03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상. 영원으로 가는 길!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