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문명의 진보 vs 몽상의 몰락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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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선이나 증기선을 발명한다는 것은 곧 난파를 발명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열차의 발명은 탈선의 발명이며, 자가용의 발명은 고속도로 위에서 일어나는 연쇄 충돌의 발명이고, 비행기의 발명은 곧 추락의 발명이다.
- 폴 비릴리오, <미지수Unknown Quantity>, 2003,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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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핵심은 시간의 불가역성이다. 기차가 발명되어 교통 시스템이 일단 바뀌고 나면 그 이전으로 돌아가기는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나룻배의 낭만을 찾을 수도 있지만 그것 또한 ‘기차로 정상적인 통행을 할 수 있을 때’, ‘여분의 쾌락’을 찾아나서는 감정의 사치에 속한다. 기차의 속도에 일단 길들어지면, 처음에는 공포와 경탄의 대상이었던 기차도 어느새 당연한 습관이 된다. 기차보다 조금이라도 느린 운송수단은 어느새 퇴행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더 높이, 더 빨리, 더 편리하게 움직이는 기술만이 끊임없이 발명된다. 아시타카는 문명 내부에 있으면서도 이러한 문명의 무한 속도전에 제동을 거는 존재다. 아시타카의 존재는 이분법적으로 ‘진보(문명)’와 ‘야생(야만)’을 분류할 수만은 없는 모순적 상황을 암시한다.
아시타카의 입장에서 봤을 때 원령공주 측은 물론 에보시 측도 나름의 정당성을 지니고 있다. 에보시는 굶주림과 질병으로 고통받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풍요로운 생활을 선물한 것이다. 문제는 에보시(문명)의 힘이 너무 일방적이고 막강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비대칭적 대립의 상황을 깨뜨리려면 그 상황에 균열을 내는 메신저가 필요하다. 아시타카가 그런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 위험천만한 메신저의 삶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양측 모두에게 첨예한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에보시 일족이 ‘문명의 의식’(합리주의)를 상징한다면 원령공주와 모로 일족은 ‘문명의 무의식’을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명의 의식은 곧 ‘자연’ 그 자체다. 문명은 자연을 질료로 창안되었지만 스스로 자연에서 멀어짐으로써 자기 자신을 타자화했다. 이 타자화된 자아의 그림자가 바로 자연인 셈이다. 단지 문명의 입장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입장에서 단지 문명을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둘 모두에게서 무언가를 배우려 하는 아시타카는 ‘몽상’의 존재로서 문명의 의식과 무의식을 연결해주는 메신저가 아닐까. 우리의 마음속에는 에보시와 원령공주와 아시타카가 모두 공존한다. 문제는 에보시적인 라이프스타일이 원령공주와 아시타카, 즉 몽상과 환상의 세계를 가차 없이 배제해버려 이제는 그 ‘흔적’을 찾는 일조차 점점 어려워져가고 있다는 점이다.
바슐라르는 밤의 무의식적인 환상과 낮의 의식적인 이성 사이에 존재하는, 정신분석 전문가들조차 별로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는 ‘몽상’을 사유의 중심에 올려놓는다. 상상력의 매트릭스는 바로 이 ‘몽상’의 에너지에서 탄생한다. 인간이 자신이 이룬 문명의 업적에 자만하지 않고(처음부터 자연이 없었다면 문명 또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인간은 너무 자주 망각한다), 대책 없이 웃자라버린 지성의 키 높이를 자랑하지 않는 것. 그럼으로써 단지 ‘인류’의 시점으로 자연을 해부하고 재단하지 않는 태도는 자연을 오랫동안 관찰하고 자연의 리듬에 맞춰 몽상하는, 사유의 여백에서 탄생한다.
몽상의 세계는 심리학자의 입장에서는 드라마틱함이 부족하고, 철학자나 과학자의 입장에서는 논리성이 부족하다. 몽상은 길 잃은 의식이거나 결핍된 환상처럼 어정쩡한 위치에 있다. 그러나 바슐라르는 몽상이야말로 인간의 사유가 다다를 수 있는 상상력의 새로운 진경을 보여줄 것이라고 믿는다. 몽상은 깨어 있는 무의식이며 검열에서 자유로운 의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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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시대에서 문명인으로 살면서, 우리는 물건들에 사로잡혀 있다. 물건 하나하나는 한 떼의 물건들의 대표자이다. 그런데 물건에 개체성이 없는데 어떻게 그것이 힘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러나 물건들의 머나먼 과거로 좀 가보자. 친숙한 물건 앞에서 우리의 몽상을 회복시켜 보자. 그리고는 조금 더 멀리, 우리가 어떻게 하나의 물건이 제 이름을 찾아낼 수 있었나 알아보려 할 때 우리의 몽상 속에서 길을 잃어버릴 만큼 그렇게 멀리 꿈꾸어보자. (……) 몽상은 대상을 성화(聖化)한다. 사랑받는 친숙한 대상에서 성스러운 개인적 대상에 이르는 사이는 백지 한 장이다. 곧 물건은 부적이 된다. 그것은 삶 속에서 우리를 도와주고 보호해준다. (……) 정말 꿈을 꿀 수 있는 것은, 절제 없이 검열 없는 몽상을 꿈꿀 수 있는 것은 ‘지식’에서부터가 아닌 것이다.
-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46~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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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령공주>에서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려낸 숲의 수호신 시시신은 아마도 바슐라르적 몽상의 힘이 다다를 수 있는 상상력의 극단일 것이다. 생명력으로 충만하던 원령공주의 숲에 밤이 깃드는 시간. 시시신이 거대한 몸집을 지닌 푸르고 투명한 데다라신의 모습으로 변해 아름다운 숲을 거니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다. 몽상의 세포가 깨어나는 시간. 대지와 휴식의 몽상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아시타카는 시시신의 물속에서 치유의 밤을 맞이하고 있다. 사경을 헤매는 아시타카 가까이로, 시시신이 천천히 움직일 때마다 그의 발자국 위에 아름다운 꽃과 식물이 피어난다. 시시신이 아시타카의 상처를 천천히 핥아주자 사경을 헤매던 아시타카는 거짓말처럼 상처를 딛고 일어난다.
어느새 마술처럼 돋아난 새살에 아시타카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남아 있는 ‘재앙신의 저주’를 다시금 발견하고 절망한다. 시시신은 아시타카가 목숨을 걸고 원령공주를 구한 것은 ‘인정’하지만 부족을 지키기 위해 재앙신을 살해한 것은 ‘긍정’할 수 없다는 것일까. 아직 끝나지 않는 저주의 늪을, 깨어나자마자 인식해버린 아시타카. 그는 간신히 힘겨운 꿈에서 깨어나자 더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는 듯 고통을 감추지 못한다. 물 한 모금 삼키지 못하는 아시타카에게 이번에는 원령공주가 먼저 다가온다. 원령공주는 자신의 입속에서 풀을 오물오물 씹어 아시타카의 입속에 넣어준다. 눈을 감은 아시타카는 할 수 없이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기면서도 밀려드는 슬픔을 가누지 못한다.
다시 살아갈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은데, 살아남기 위해 작은 소녀의 입속을 빌어 음식을 삼켜야 한다는 사실이, 죽어도 삼키기 싫지만 삼켜야 하는 가혹한 운명처럼 곤혹스럽다. 아시타카를 살리기 위해 음식을 대신 씹어 입에 넣어주는 소녀의 모습에는 적대적인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한없이 따스한 치유의 모성이 살아 숨 쉰다. 아시타카는 살아 있다는 사실이 지겨워서, 부족을 위해 살아남아야 하는 현실의 짐짝이 너무 무거워서, 그렇지만 자신을 살리기 위해 낯선 사람에게 풀까지 씹어 먹이는 원령공주의 품이 너무 따뜻해서, 눈물을 뚝뚝 흘린다. 원령공주와의 만남을 통해 아시타카는 자신이 인식하지 못했기에 미처 그 고통을 감지하지도 못했던, 무의식 속에서 등을 돌린 채 흐느끼는 또 다른 자아의 그림자와 만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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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는 원래 자기 방어를 하고 자기의 야망을 좇기 때문에 방해가 되는 것은 뭐든지 억압해야 한다. 이 억압된 요소가 그림자가 된다. (……) 그림자는 두 가지 모습을 지닌다. 먼저 자아의 어두운 측면이다. 평상시 이 부분은 깊숙이 잘 감춰져 있다. 삶의 어려움에 직면하기 전까지 자아는 이 존재를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자아 본위의 삶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우리의 내면 깊숙이 억압된 부분이다. 그것이 아무리 사악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이 부분은 근원적으로 자기(the Self)와 연결되어 있다.
궁극적으로 하느님(혹은 자기 the Self)은 자아보다 그림자를 선호하신다. 그림자는 아주 위험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중심, 즉 진정한 우리 자신과 훨씬 가깝다.
- 로버트 존슨, 고혜경 역,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 에코의 서재, 2008, 64~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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